마모루, 아버지에게 히로토가 돌아왔어.

비에 쫄딱 젖은 채로 학교에 찾아온 히로토가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수업 중의 불상사에 놀란 채로 굳어진 선생에게 엔도가 물었다. 선생님, 나가봐도 될까요? 엔도의 이름이 엔도 마모루였음을 떠올린 선생은 그러렴, 하고 겨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가자, 히로토. 짧게 말을 끊으며 히로토의 어깨를 쥐고 빠져나가는 엔도의 뒷모습을, 고엔지가 빤히 보다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부실 쪽으로 향하는 인영人影 둘이 보인다. 별 일도 다 있네, 한다의 중얼거림을 적당히 한 귀로 흘리며 고엔지는 칠판으로 시선을 맞췄다. 이제야 잠시 멈추었던 수업이 재개한다.

 

**

 

무슨 일인데, 히로토.”

보송보송한 수건과 유니폼을 건네주며 엔도가 물었다. 히로토는 가만히 수건에 뺨을 묻더니 오물오물 말을 뱉어냈다.


미안, 마모루. 수업 못 듣게 해서.”

됐어. 여간해선 그런 일 안 할 거잖아.”

고개를 흔드는 엔도를 보며 히로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마모루라면 그렇게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히로토의 목소리가 사그라지는 게 덜컥 불안해져 엔도는 짐짓 큰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수업 안 들어도 되고 좋다고. 키도에게 또 신세져야겠지만. 영어는 어렵단 말야.

, 그렇지.”

나른하게 웃는 히로토에게 빨리 옷이나 갈아입으라고 재촉하며 엔도가 히로토의 점퍼를 벗겨냈다. 물을 먹어 진해진 주황색 점퍼에서 물방울이 뚝뚝, 무겁게 바닥으로 늘어진다. 급한 대로 제 로커에 점퍼를 걸어두고서야 바닥에 난 물길을 본 엔도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산이라도 쓰고 오지. 히로토가 끌어안은 수건을 빼앗아 머리 위에 덮어주며 핀잔을 하면, 히로토는 뭉그적대며 젖은 옷을 벗어 몸의 물기를 닦고 라이몬 유니폼까지 갖춰 입었다.


춥지? 져지는 집에 갖다놔서 어쩔 수 없어. 그래도 내 유니폼이니까 좀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골키퍼는 긴 팔이잖아, 하고 수건을 하나 더 꺼내 어깨에 걸쳐주는 엔도에게 히로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모루, 키라 히로토가 살아있대. 누나가……히토미코 감독이 찾아냈어.”

죽지 않았대. 시체도 찾지 못했던 게 아니라 찾을 수 없었던 거야. 안 죽었으니까. 피를 많이 흘렸고 머리카락이나 살점도 발견 돼서 정말 죽은 줄 알았었대. 근데 병원에서, 너무 한적해서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그런 시골 병원에서 발견했대. 키라의 재력으로 최고의 의술을 써서, 어제 겨우 깨어났대.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어서 미안하다고 했대. 오늘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고, 지금 말해줘서 미안하대. 키라 히로토는 축구공을 보고 아주 좋아했다더라. 축구하는 거야, 키라 히로토도. 지금은 내가 더 잘 하겠지만 키라 히로토가 더 잘하게 되면 어떡하지? 난 핏줄도 아닌데? 키라 히로토를 이길 건 축구밖에 없는데?

엔도에게 매달리듯이 말을 쏟아내던 히로토는 겨우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황망한 마음으로 히로토의 어깨로 손을 가져다 대려는 찰나에, 히로토가 중얼거렸다.


마모루도 축구 잘 하는 히로토 쪽이 더 좋게 되겠지?”

무슨 소리야, 히로토!”

나는 키라 히로토의 카피로 자랐으니까. 히토미코 감독의 뜻대로.”

그러니까 별로 특별할 것 없잖아. 좀 더 나은 히로토가 있으……. 니까, 로 끝맺으려던 말이 도중에 끊긴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히로토는 얻어맞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멍하니 마모루도 사람을 때릴 줄 아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완전히 화난 얼굴로 엔도가 말했다.


그야 키라 히로토가 축구를 좋아하고 잘 한다면 기뻐! 히로토와 비슷하다면 친해지기도 쉽겠지! 솔직히 히로토에겐 미안하지만, 난 키라 히로토와도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해!”

히로토는 거 봐, 하고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도 빼앗기고, 누나도 빼앗기고, 마모루도 빼앗기면 나는 누구로 있으면 좋지. 점점 갈앉는 히로토의 눈에, 불쑥 엔도가 다가와서 클로즈업 된다. 깜짝 놀라 몸을 빼거나 하지도 않고 가만히 이쪽을 주시하는 히로토에게 엔도가 말했다.


그 히로토는 외로울 거 아냐! 힘든 일을 겪었고, 세상은 많이 변했고, 아버지는 감옥에 계셔. 친구도 없고, 그 좋아하는 축구도 오랫동안 못했단 말야. 하지만 키야마 히로토, 너는 아니잖아!”

난 아니라고?”

키라 히로토가 아무리 너와 닮았어도 난, 나는 키라 히로토랑 친해진 기억은 없단 말야! 그동안의 기억은 전부 네 것이잖아!”

……마모루.”

있잖아, 히로토. 그래도 불안하다면, 말해줄게. 나는 절대로 널 버리지 않을게. 정말이야.”

내 안의 히로토는 키라 히로토의 대타가 아니니까. 히로토는 둘이라도 키야마 히로토는 하나니까. 그렇게 말하면, 히로토는 그제야 안심해서, 겨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 오늘 나 연습 쉬어도 될까?”

에엑? 무슨 일이에요, 캡틴!”

별 일이네, 엔도. 네가 연습을 마다하다니.”

주위의 소란에 어안이 벙벙해진 엔도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유니폼이고 져지고 체육복이고 전부 없어서. 그렇다고 교복 입고 연습하는 건 아무래도 혼날 것 같고……. 대신 내일은 두 배로 공을 받아줄 테니까 말야!”

두 배 더 다칠 일 있냐.”

소메오카의 핀잔에 배시시 웃는데, 고엔지가 공을 차올려 무릎으로 통통 튕기며 물었다. 괜찮냐. 짧은 질문에 엔도는 잠시 착잡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조금은 위로가 된 것 같아. 그렇게 말해주면 고엔지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 말이야.

 

**

 

내가 괜찮고 말 일이 어디 있어. 고엔지의 말을 떠올리며 엔도는 어려운 표정을 했다. 힘든 건 히로토인데 왜 내 안부를 묻지? 고엔지 녀석도 꽤 이상하단 말야. 생각하는 걸 관두고 횡단보도 앞에 서는데, 맞은편에 선 히로토가 보였다. 유니폼은 내일 갖다 줘도 된다니까 뭘 벌써 왔지, 하고 태평하게 생각하면 건너편의 히로토가 시선을 눈치 채고 빙긋 웃는다.


……어라?”

히로토 녀석, 저렇게 혈색이 좋았던가. 유령처럼 하얗게 빛나서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던 첫인상을 생각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신호가 바뀌어도 섣불리 건너지 못하고 있으면, 히로토가 이쪽으로 건너와 말을 걸었다.


네가 엔도군이구나.”

비슷한 목소리와, 비슷한 웃는 얼굴이 빙글빙글 머릿속을 헤집는다.


넌 키라 히로토?”

갈라진 목소리로 물으면, 키라는 기쁜 듯이 미소를 더욱 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버지 다음에 널 만나러 오는 건 정답이었다면서.

 

**

 

나구모와 스즈노란 애들은 집까지 나가버렸어. 이야기를 듣자하니 한국으로 간다는 것 같아. 내가 내 집으로 돌아온 게 잘못은 아닌데. 누나가 날 찾은 것도 잘못이 아니고. 빨대 끝을 씹으며 말하는 키라에게 엔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기 앞에 놓인 바나나 주스도 키라 쪽으로 밀어주면, 키라는 엔도군은 친절하구나 하며 웃었다. 그러고 보면 히로토는 날 마모루라고 불렀지, 그래서 어색했구나. 엔도는 마주 앉은 키라를 보며 생각했다.

 

오늘 키야마군을 봤어. 집에 돌아와서, 널 만나러 나오기 전에.”

골키퍼 유니폼을 입고 있어서 축구 하냐고 물어봤어.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제 컨디션은 아니지만, 슛 받아줄 수 있냐고. 등에 엔도라고 적혀있어서 엔도군이냐고 물어봤더니 화를 내지 뭐야. 마모루를 부르지 말라고. 알고 보니 그는 키야마 히로토였어. 누나가 말했었는데, 나와 꼭 닮은 아이라고.


아냐, 너와 히로토는 달라.”

무심코 키라의 말을 끊고 끼어들면, 키라는 엔도를 빤히 쳐다보더니 엔도의 바나나 주스에 빨대를 옮겨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말해준 건 네가 처음이야.”

고마워. 엔도에게 던져진 그 말은 엔도를 무겁게 짓눌렀다. 내 자리는 닮은 히로토가 전부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돌아오지 않아도 됐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불안했어. 있잖아, 키야마군은 축구도 잘 한다며? 누나가 좋은 포워드라고 했어. 엔도군은 골키퍼니까 키야마군의 슛을 받아봤지? 어땠어? 조잘조잘 새가 노래하듯 경쾌한 리듬으로 묻는 말엔 언저리마다 상처가 묻어나서, 엔도는 제 목이 조여 오는 듯 했다.


히로토는, 좋은 슛을 쏴. 축구를 무척 잘 해. 나도 막기 힘들어서 고전했었어.”

……그렇구나.”

저기, 너는 어땠어?”

처음으로 키라에게 질문을 건네면, 키라는 씩 웃어보였다.


, 잘 했었어. 축구 유학을 갔을 정도로.”

예정대로였다면 지금쯤 엔도군을 날려버릴 슛을 쐈을 텐데, 하며 너스레를 떨면 엔도는 나도 꽤 한다고, 하고 대답했다. 그럼 다음에 내 슛을 받아줘.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키라는 절박한 눈으로 엔도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만은 키야마 히로토와 매우 닮아있어서, 엔도는 차마 저버리질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꿈에 히로토가 두 명이어서, 엔도군과 마모루를 부르면서 자신을 양쪽으로 잡아당겨서, 너무 아파서 울면 눈앞에 고엔지가 나타나서 괜찮냐고 물어봐왔다. , 히로토들은 괜찮아. 그렇게 대답하면 고엔지는 다시 너는?’하고 물어서, 엔도는 울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는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늦은 대답을 했다.

  

아니, 히로토들이 너무 아파해서 나도 힘들어.

  

그러면 고엔지가 꿈에 나와, 너는 너무 타인의 고통까지 삼키려 한다며 한숨을 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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