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자의 자격을 걷어차는 자신을 보면 크로우 크루아흐는 실망할까? 하지만 루에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제 선택에 자신이 있었다. 치명적인 실수를 범해 크로우 크루아흐를 영면과도 같은 잠 속으로 빠트린 밀레시안에게, 루에리는 적당한 헛소리를 지껄이며 덥석 '감응자'라는 짐을 안겨주었다. 밀레시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지만 루에리는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제 오해로 인한 지난 앙금을 사과하며 풀어낼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고, 그럴 낯도 없었으며, 적어도 지금은 밀레시안 역시 실수를 저지른 바보동지였다. 고개를 당당히 들고 멋대로 감응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납득하지 못했지만 밀레시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루에리의 말에 순응했다. 아무렴, 선택받은 자라면 그래야지.
멀어지는 밀레시안의 뒷모습을 보다 루에리는 끓어오르는 용암으로 고개를 돌렸다. 뜨거워 보이지만 파충류는 어차피 차가우니 버틸만할지도 모른다. 정 못 버티겠으면 알아서 그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겠지. 적어도 '파괴와 죽음의 신'이라는 크로우 크루아흐가 죽는다는 것은 루에리의 안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루에리는 지독히도 담담했다.
하지만 잠결에 들릴지도 모르니까, 중얼거려봤다.
"계율을 아니 어쩌니 하면서 날 높이 산다던 당신이라면 내 결정은 존중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부글부글 대답 대신 용암이 끓었다. 루에리는 짧게 웃고는 기지개를 쭉 폈다. 이제 그 퍼런 드래곤인가 뭔가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루에리는 여전히 어느 파벌의 편도 아니었지만, 받은 것은 돌려줘야 하는 성미였다.
─그래, 오랜 꿈을 꾸었다.
분화구 안으로 떨어지는 용의 그림자와, 무엇도 원망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는 편안한 얼굴을 몇 번이고. 죽지도 않은 녀석의 원수를 갚을 마음은 없지만, 기분 나쁜 꿈을 꾸게 한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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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어째서 벌써 다 끝나버린 거야.
레가투스의 등에서 내려선 루에리는 허탈함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자이언트와 엘프, 밀레시안, 맥없이 쓰러져있는 붉은 용. 아드니엘과의 감응이 끝나고 하나 둘 자리를 비우자, 루에리는 가만히 크루메나를 내려다보다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치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크루메나는 깊은 숨을 토하며 말을 걸어왔다.
"…감응자 자리를 어리석은 밀레시안에게 넘겨줬더군, 크로우 크루아흐의 유물이여."
"아직도 안 죽다니 명도 질기군. 어리석은 용이 선택한 나라고 영리하겠어? 그러는 네녀석도 어리석으니 당했을 테고."
"널 감싸줄 날개도 없는데 기가 세구나."
"날개따위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어. 언제나 내 손으로 해결했으니까."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루에리에게 크루메나는 후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크로우 크루아흐의 원수를 갚으러 왔더냐?"
"그럴 의리도 없고, 다 끝난 마당에 잔해나 들쑤시는 취미는 없어. 그 밀레시안, 감응이나 할 것이지 또 죽어라고 싸워대서는…."
자기가 못 팬게 못내 아쉬운 듯 투덜거리는 루에리를 크루메나는 신기한 듯 보았다.
"그래, 너처럼 기가 센 녀석은 처음이지. 나나 크로우 크루아흐나. 그 녀석이 죽는 마당에도 너를 지킨 이유 정도는 알 것 같다."
"안 죽으니까 지킨 거야, 그 녀석."
"뭐?"
"모리안도 두려워하는 녀석이 겨우 아드니엘의 힘에 죽을까봐? 단순한 용이라면 난 진작에 썰어버리고 울라 대륙에 돌아갔어."
"…잠깐, 그게 무슨 말이지?!"
"애초에 죽음에서 태어난 신이라더라고, 그 용씨는."
크루메나는 할 말을 잃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겨우, 완패로군, 하고 실실 웃었다. 이 기운 쏙 빠진 크루메나의 처분이야 레가투스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끄고, 루에리는 아직 남아서 이쪽을 보고 있는 레가투스에게 말했다.
"감응도 끝났으니 난 울라 대륙으로 돌아가겠어."
"뜻대로 해라. 하지만…돌아가서 뭘 어쩔 셈이지?"
"내가 있어야 할 곳에 가겠다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굳이 말하자면, 날 온갖 일에 말려들게 한 이 '운명'이라는 걸 알아보고 싶을 뿐이야. 모이투라 전투부터 아버지의 계약건, 신들의 분쟁 따위를 말이지."
"꽤나 의욕적이군."
"여기선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다고. 감응자의 운명이니 뭐니 하면서 어두컴컴한 미래 따위나 주입당해야 하니까. '내 의지로 미래에 맞서 희망을 찾아 세계를 변화시킨다' 정도의 포부는 있어도 되잖아?"
미래가 어둡네, 희망을 찾기 힘드네 하면서 감응자에게 겁을 줄 땐 언제고. 레가투스는 픽 웃으면서도 꿈이 있어 좋군, 하며 루에리가 등에 오를 수 있도록 날개를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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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꽤 오래된 글이지만 나름 애착이 가는 글입니다. 이 글을 밑바탕으로 우열雨裂을 썼고요ㅇㅅ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