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의 눈에 인간세상이란 무채색이라서, 우거진 녹음이나 울긋불긋한 꽃 따위를 제외하면 색감을 느낄 일은 거의 없었다. 그 때문이었나, 기나긴 잠을 깨운 인간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한낱 인간의 소원일 뿐이었다. 인간은 드래곤이 익히 잘 알고있는 인간 그 자체라서, 뻔한 소원을 빌었다. 드래곤은 딱히 실망하지 않았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였다. 단지 흥미는 있었다. 무채색의 세계 속에서 탐욕스러운 색을 감추지 않는 인간의 피에 대해서.
"혈육은 있는가?"
가볍게 물으면 인간은 역시 가볍게 아들이 있다고 대답했다. 드래곤은 순수하게 궁금했다. 인간의 아들도 이렇게 선명한 색을 하고 있을지. 아버지와 같이 탐욕스러운 색을 띠고 있는지. 아니면 역시 무채색인지.
"…좋다, 계약하지."
정말로 한낱 인간의 소원일 뿐이었다. 들어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지위와 명예를 약속받은 인간은 무심하게도 계약 조건조차 확인하지 않았고, 드래곤 역시 잔인하게도 소원을 이루어준 후에야 조건을 말해주었다. ─그대의 아들의 운명을 받겠다. 그 한 마디에 절망하며 무너져 내리는 인간을 드래곤은 별 감흥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
"당신이 내게 잘해줄 이유는 없을 텐데?"
도발하듯 묻는 말에 드래곤은 잠시 멍해졌다. 그야 그랬다. 루에리는 제 아버지의 업으로 팔아 넘겨진 존재였다. 드래곤이 노동을 시키든 학대를 하든 루에리는 할 말이 없는 위치였다.
"설마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건가?"
"…깨닫지 못했다."
루에리는 한심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머쓱해진 드래곤이 짐짓 이죽거리며 '함부로 대해주길 원하는 건가'하고 물으면 루에리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제물을 대하는 태도 치고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지 않나 싶었을 뿐이다."
반박할 말이 없어 쓰게 웃는 드래곤에게 루에리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유는? 드래곤은 곧 미소를 거두었다.
"그대가 붉은 머리이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모르겠군."
무채색의 세계에서 붉게 빛나는 것이 있었다. 이종족에겐 기본적으로 관심이 적은 드래곤의 눈에도 들어박힐 정도로. 하지만 제 아버지와는 다른 색이었다. 탐욕스러운 색이 아니었다. 밝고 유쾌한 붉은 색. 차분하고 외로운 붉은 색. 고고하지만 보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붉은 색. 시간을 잃고 변함 없이 영원을 반복하는 인간들 속에서 그 색은 유일하게 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홀릴 수 밖에 없었다.
"말해봤자 비웃음 살 테니 비밀로 해두지."
그 한 마디에 빈정상한 듯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루에리를 드래곤은 즐거운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 END
모처럼 2대에 걸친 인연이니까 써먹긴 해야지 싶어서ㅇ..
내 눈엔 블링블링 빛나는 루에리*'ㅅ'* 이게 바로 콩깍지인가여ㅎ
아무튼 다난 애들은 타르라크 인증 기억상실+시간대 루프니까 죽는 경우 제외하면
루에리나 나오 같이 플레이어가 실시간(은 아니지만)으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NPC가 적죠.
메인스트림에나 나오지ㅋㅋㅋ 여하튼 유저 눈에는 특별할 수 밖에 없는 NPC인 것 같아요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