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1일 케이크 스퀘어에서 배포한 내용입니다.
우열雨裂
태어나자마자 열등하다고 낙인찍히는 것은 잔혹하다. 그리고 그 열등함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사는 것은 더더욱 잔혹하다. 대련이 끝난 뒤 쏟아지는 환호성에 웃음으로 답하면서도 루에리의 마음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역시 우성 알파 출신은 다르구나.
누군가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린 말이 송곳이 되어 루에리의 가슴을 찔렀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는지 아이던이 어깨를 툭 치며 눈을 마주쳤다. 아마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는 알아' 정도의 위로일 것이다. 루에리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노력을 인정받지 못한 게 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우성 알파가 아니라는 것에 속이 뒤틀렸다는 것을 아이던은 모른다.
가르쳐 줄 수도 없다.
영주님 댁은 대대로 우성 알파만 나온다는 이야기는 이멘마하에선 상식이었다. 우성이라거나 알파라거나 하는 것이 유전인자로 결정되는 만큼, 나무랄 데 없는 우성 알파인 영주의 모습에 사람들은 당연히 그 자제들도 그럴 것이라 여겼다. 병약한 몸을 타고난 차남조차 의심한 적이 없으니 늘 검을 휘두르는 장남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때로는 침묵이 금이 될 때도 있지.
루에리에게는 거의 입을 열지 않는 영주가 나직하게 내뱉은 말은 루에리에게 재갈을 물렸다. ‘우성 알파’는 우월함의 상징이었다. 그 우월함에 감히 흠집을 낸 루에리는 영주의 뜻대로 열등한 자신을 숨겨야 했다. 사정을 아는 에스라스가 잘하고 계신다며 간간이 위로했지만 측은함이 섞인 눈빛이 뒤따라와 속을 할퀴었다. 병석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리안조차 안쓰러운 얼굴로 루에리를 대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 형. 악의 없는 말에 몇 번이나 목이 메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어느 날 루에리는 저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난 집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어.”
조심스레 토해 낸 진심에 아이던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늘 밝은 얼굴로 시원스럽게 움직이는 루에리가 답지 않게 어두운 얼굴로 무겁게 입을 연 것부터가 아이던에게는 천지가 뒤집힐 일이었다. 넌 속도 없이 사는 줄 알았다. 아이던의 말에 루에리는 파하하 웃다가 뭐가 문젠데, 하고 던져진 꽉 찬 직구에 가만히 웃음을 거뒀다. 그냥, 힘들어서. 차마 제 문제를 설명할 수 없는 루에리의 둘러댐에 아이던은 성 밖에 자자한 소문을 떠올렸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영주님께서 리안 도련님만 아끼는 것 같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능숙하게 돌려 말할 줄을 모르는 아이던에게 너도 참 어지간하다, 하는 얼굴로 루에리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영 헛소문은 아니야. 애매한 긍정에 아이던은 루에리를 곁눈질하던 시선을 호수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네가 힘든 걸 아무도 모르니까.”
“응?”
“약한 소리를 안 하는 사람에겐 그만큼 소홀해지잖아. 네가 도련님처럼 몸이 약한 것도 아니고. 늘 멀쩡한 얼굴로 혼자 애쓰고 있으니까 그래.”
아이던이 늘어놓는 말은 루에리에겐 고맙지만 무서운 것이었다. 단순히 영주의 차별대우 때문에 꺼낸 말인지, 루에리에게 유독 묵직하게 내려앉는 우성 알파에 대한 시샘과 기대감을 염두에 두고 꺼낸 말인지, 그것도 아니면 ‘뭔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꺼낸 말인지 루에리는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이던은 루에리의 속을 알 수 없었으므로, 약간의 안쓰러움을 담아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네가 애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약한 소리 좀 하면서 살아.”
그러면 숨 좀 트이겠지. 무뚝뚝한 말투로 쑥스러움을 무마하는 아이던에게 루에리는 겨우 고마워, 한 마디를 건네고는 몸을 일으켰다. 호수를 등지고 성을 향해 걷는 내내 루에리는 방금 전 이야기를 곱씹었다. 아이던이 눈치채지는 않았는지, 그럴 만한 재료를 자신이 내놓았는지를 따져봐야 했다.
아이던은 알아차리더라도 누구에게 말할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만에 하나 새어나가면?
가장 믿음직한 사람을 속으로 재면서 의심하는 스스로가 한심해 루에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퍼뜩 스친 생각에 아예 걸음까지 멈춰버렸다.
괜찮아, 아이던은 베타니까 들키지 않아.
그날 이후 루에리가 두른 외피는 더욱 단단해졌다. 아이던에게마저 밝고 속없는 망나니 도련님의 모습만 보이게 되었다. 베타라는 이유가 없으면 누구도 믿지 못하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서이기도 했고, 다시는 그때와 같은 불안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루에리가 마냥 유쾌한 도련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도 어쨌든 아이던은 침묵했다. 그저 가끔 루에리를 보며 뭔가 말을 삼킬 뿐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루에리는 식은 머리로 아이던의 충고를 떠올리곤 했다. 루에리가 애쓰지 않아도 되는 곳은 이멘마하에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건 아이던도 막연히 느끼고 있었는지, 어느 깊은 밤 슬쩍 이멘마하를 빠져나가는 루에리를 아이던은 군말 없이 보내주었다.
우성과 열성의 구별을 이해했을 때부터 이멘마하는 거대한 우리 같았고, 루에리는 그 안에 갇힌 동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기대하는 대로 아버지에게 주입당한 우월함을 연기하면 박수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게 기쁜 일인가하면 아쉽지만 전혀 아니었기에 루에리의 대 탈주는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정해진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수를 바라보며 던진 아이던의 말은 루에리의 안을 줄곧 빙글빙글 맴돌아서, 문득 정신을 차리면 꼭 물가 주변에 짐을 풀고 있었다. 애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란 물과 같은 곳이라고, 너는 거기에 가야만 한다고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그래서 아델리아 천 앞 여관에 짐을 풀고, 마을에서 만난 똑똑한 마법사와 작은 궁수를 친구 삼고, 캠프파이어 앞에서 서툰 연주를 들으며 웃고 떠드는 일상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도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 루에리는 퍽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루에리가 온전히 티르코네일에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그 일상은 깨지고 말았다.
“나 우성 오메가래.”
열병과 함께 찾아온 마리의 각성은 유독 일렀다. 타르라크는 마리도 벌써 숙녀가 다 됐군요, 하고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방안을 가득 채운 진한 복숭아 향에 숨조차 제대로 못 쉬는 건 루에리뿐이었다. 문병용으로 가져온 사과 바구니를 바닥에 떨어뜨린 채 루에리는 도망치듯 마리의 방을 빠져나왔다. 타르라크가 당황해서 부르는 목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옷에 밴 오메가의 페로몬이 살갗을 간질여서, 어서 씻어내지 않으면, 그것만을 생각하며 언덕을 거슬러 올랐다. 그리고는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자마자 곧바로 냇물에 뛰어들었다. 거칠게 윗옷을 벗고 흐르는 물에 머리끝까지 담그고 나서야 민감하게 달아오른 피부가 천천히 식어갔다.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을 직격으로 접한 건 처음이었다. 자칫하면 한 순간에 이성이 마비되고 짐승이 될 수 있는 게 열성 알파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타르라크는 우성 알파였지. 어쩐지 멀쩡하더라, 나완 다르게. 자조하며 중얼거린 말이 다시 흉기가 되어 루에리에게 돌아왔다. 그래서 루에리는 더욱 더 단단한 외피를 마련해야 했다.
다행히도 루에리의 행동은 ‘마리의 각성에 당황해서’라는 조잡한 변명으로 무마되었다. 우성 오메가의 페로몬에 휘둘렸을 거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추측을 아무도 입에 담지 않은 것은, 루에리가 열성 알파임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페로몬을 갈무리하고 억제제를 꼬박꼬박 챙겨먹는 주제에 잘도 편안한 곳이라고 생각했구나. 스스로에게 코웃음을 치면서도 루에리는 철석같이 베타를 연기한 자신에게 안도했다. 마리에게 겁을 주기 싫은 만큼이나 마리에게 겁을 먹은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바보 루에리는 생각보다 순진하구나! 병석에서 일어난 마리의 태평한 놀림을, 그리고 주변에 은은하게 퍼지는 복숭아 향을 루에리는 어떻게든 웃어넘겼다. 그럴 때마다 다시금 머릿속에는 아이던의 그 ‘애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는 말이 찰랑거리는 물처럼 밀려들어오는 것이었다.
**
신에게 바쳐진 산 제물처럼 제단 위에 곱게 뉘인 몸을 일으켰을 때 루에리는 저도 모르게 하하, 하고 메마른 웃음을 뱉었다. 낯선 곳에서 의식을 찾자마자 들리는 소리가 물 흐르는 소리라니 전생에 물귀신이라도 됐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주변을 둘러보려고 해도 못처럼 짙은 녹색을 두른 용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어서, 루에리는 어쩔 수 없이 용에게 말을 걸었다.
“주변에 물이 있습니까?”
“강이 있다. 제법 큰 폭포도 근처에 있지.”
“당신이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겁니까?”
“그래. 네가 살던 곳과는 다른 대륙이다.”
바다를 건넜구나. 루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은 루에리에게 저를 크로우 크루아흐라고 소개했고, 루에리에게 지난 전쟁과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네 아버지와의 계약의 대가로 너를 받기로 했다. 선언하듯 단호하게 내려진 말에 루에리는 담담하게 물었다.
“아버지가 저를 주겠다고 한 겁니까?”
“네 아버지는 계약 조건을 미리 확인하지 않았지.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
“제가 무엇을 걱정했단 말입니까?”
“네 아버지가 대가로 너를 ‘선택’했는지가 네게는 중요하지 않느냐.”
네 동생이 아닌 너를 영주가 스스로 선택했는지를 묻고 싶었겠지. 다 안다는 듯이 이어진 말은 분하게도 정말이어서, 루에리는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저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 겁니까.”
“네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까지 알고 있단다.”
비밀이라는 것은 새기 마련이라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은 루에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여행 가방을 꾸리는 것처럼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아니라서, 루에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낯선 용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너는 나와 계약으로 얽힌 몸이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네가 겪은 일도, 앞으로 겪을 일도 조금은 보이는구나.”
딱하다는 듯 한숨 섞인 말투였다. 낯선 용에게 제 치부를 들킨 것도 모자라 동정까지 산 루에리는 파리한 안색을 굳히고 독기 서린 눈을 맞부딪치며 물었다.
“……당신도 제 열등함이 불쌍합니까?”
“너의 그런 점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열등하다는 꼬리표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거기에 가장 얽매여 있다는 것이.”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루에리는 다시 무너졌다. 하지만, 그건 제게는 중요한 일이었고, 사람들은 모두 그런 걸 중요하게 여겼고, 어차피 당신은 알지 못할 일이고……. 더듬더듬 뭔가 이유를 찾으려는 루에리에게 용은 딱 잘라 말했다.
“네 말처럼 너희들이 서로를 나누는 기준은 드래곤이나 신에게는 무의미하다. 내게는 네가 누구보다 선명한데 눈에 보이지 않는 기준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너는 잘하고 있단다.”
신기하게도 용의 위로는 자연스럽게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 이유가 종족이 달라서인지, 처음부터 제 정체를 아는 상대라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떤 말보다도 ‘선명하다’는 단어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 물에 사르르 녹아들어서 붉디붉은 색을 입혔다. 그 용암처럼 치밀어 오른 뜨거운 것을 루에리는 꿀꺽 삼키고는 대신에 깊은 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그런가, 잘하고 있었던 건가.
용과의 생활은 썩 나쁘지 않았다. 용은 인간으로도 모습을 바꿀 수 있었고, 그 외에도 재주가 많아 불편함을 느낄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대였다. 페로몬을 숨긴다든지 억제제를 먹는다든지 하는 헛된 일도 전부 관뒀다. 루에리가 은근슬쩍 존댓말을 관두고 건방진 듯 굴어도 용은 아마 그게 네 본질이겠지, 하고 빙긋 웃을 뿐으로 도무지 화를 내지 않았다. 인외 생물 중에서도 용이라는 종족은 명이 길다. 하물며 ‘크로우 크루아흐’는 웬만한 신보다도 먼저 존재했을 죽음이니 인내심이 강할 법도 했다. 죽음이 서둘러서야 파괴밖에 더하겠나. 용이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이었지만 루에리는 내심 수긍했다. 적어도 눈앞의 용 정도는 느긋하게 있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루에리의 길지 않은 삶에서 바라는 일은 대체로 틀어지기만 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크로우 크루아흐’가 떨어진 용암을 루에리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죽음의 신이 죽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부조리한 상황이라 루에리는 용이 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주 깊게 잠들 수는 있을 것이다. 루에리의 안을 가득 채웠던 용암이 시선을 따라 화산 속으로 뚝뚝 떨어졌다. 애쓰지 않을 곳이란 물과 같은 곳이라 이렇게나 쉽게 흘러가고 마는 모양이었다.
“이봐.”
짧게 부르는 소리에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용이 말한 바에 의하면 ‘계약으로 얽힌 몸’이니 틀림없이 들릴 터였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면 나타나 맞으러 오겠지.
“난 당신 앞에선 숨을 쉴 수 있었어.”
그러니까 너무 느긋하게 오지는 마. 나지막한 속삭임을 끝으로, 루에리는 다시 단단한 외피를 두른 채 화산을 등지고 걸어 나갔다.
-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