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판 LAST GAME 스포 주의
※상/하편 중 상편입니다.
흑우 전력 60분 주제 '짝사랑' 받아 썼습니다. 제목 못 짓는 병에 걸려 그대로 갖다 붙임(..
[화흑] 짝사랑上
Kagami Side
사랑에 빠진 순간은 잘 모르겠다. 애초에 한순간에 빠질 수 있는 건가, 그거. 귀여운 얼굴로 귀엽지 않은 말을 뱉는 게 귀엽다, 하는 경지에 다다랐을 때 무심코 깨달았을 뿐 실은 꽤나 오래전부터 천천히 잠겨들었던 것 같다. 농구 이외에는 표정 하나 읽히지 않는 상대를 두고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친구나 동료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에 카가미는 만족했다. 간간이 주먹을 맞댈 때 뜨거운 것이 가슴에 콱 뭉치며 벅차오르는 그 감각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렉스의 전화를 받았을 때, 미국…… 하고 되뇌면서도 바로 등 뒤에 선 상대에 대한 일만 생각했다.
내가 가면 저 녀석과 더는 농구할 수 없는 건가.
전화를 끊고도 멍하니 선 카가미에게 상대, 쿠로코 테츠야가 물었다.
“혹시 스카우트입니까?”
“……어, 어떻게 알았어?”
“그야 단순히 놀러 오라거나 훈련하러 오라는 얘기에 그렇게 굳을 리 없지 않습니까. 카가미 군의 실력이라면 언젠가는 당연히 나올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쿠로코는 언제나처럼 침착하고 담담해 보여서, 카가미는 솔직히 쿠로코의 평가에 기뻐할 수가 없었다. 쿠로코는 가만히 카가미를 응시하다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일단 비밀로 하고 혼자 생각해보세요. 당신에게 있어 좋은 기회지 않습니까.”
쿠로코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당장 ‘빛’이 없어지면 가장 곤란할 사람인 쿠로코가 등을 밀어주는 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연애 감정이 끼어든다면 이야기는 별개라, 카가미는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어어, 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쿠로코의 표정과, 쏟아지는 뙤약볕과, 귀를 찌르는 매미 소리에 카가미는 눈앞이 아찔해왔다. 그러고는 아아, 정말 가망 없었구나-. 하고 머릿속 한구석에서 맥 빠진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
고백도 전에 실연당한 허무함을 진득하게 곱씹을 사이도 없이 재버워크와의 재대결을 위해 주변은 바쁘게 돌아갔다. 농구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꽉 채워진 일정이었지만 문득문득 생각은 스쳐 지나갔다. 언제나처럼 손 안 가득 뜨겁게 전해지는 쿠로코의 패스에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오르고,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표정한 쿠로코의 모습에 실망한다. 쿠로코의 패스가 눈부신 빛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질 때마다 당장 저 패스를 빼앗아 직접 골에 처넣고 싶다고 생각한다. 쿠로코는 앞으로 어떤 빛의 그림자가 되어버릴지를 어쩔 수 없이 상상하고 상처받는다. 복잡했다. 자기의 미래나 세이린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머리로 너무 많은 걸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내시에게 맞을 듯한 쿠로코의 앞으로 뛰어들 때는 엉망진창이었던 머릿속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새빨갛게 물들었다. 처음 날린 주먹을 내시가 피하지 않았다면, 쿠로코가 농구로 승부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면 주먹 싸움이 되고 말았을 터다. 그래서 쿠로코가 핀잔을 주었을 때 카가미는 거기에 대해서는 변명할 수 없었다.
“카가미 군, 거기서 주먹을 휘두르면 어떡합니까. 잘못했으면 경찰 신세라고요.”
“……미안.”
“솔직하게 사과하다니 별일이네요.”
“정말 때려눕히려고 했으니까.”
“반성하는 거 맞습니까? ……그래도 구해준 건 감사합니다. 내일 못 나갈 정도로 당했으면 곤란하니까요.”
“너야말로 그렇게 침착하게 할 말이냐?”
모모이 씨나 감독이 알면 곤란하고 다른 팀원들에게도 괜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으니 알아서 처치하겠습니다, 하는 쿠로코를 말리고 카가미가 치료하던 참이었다. 카가미는 잔뜩 멍이 든 쿠로코의 배에서 찜질팩을 내리고 붕대를 꼼꼼하게 감았다. 윽, 하고 작게 신음하는 쿠로코를 보자 머리에 다시 피가 오를 것 같아 카가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너 진짜 그 욱하는 성질 고쳐라. 한주먹도 안 되는 게 왜 시비를 걸어.”
“시비가 아니라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한주먹도 안 된다니 불쾌하군요. 저도 제법 합니다. 보세요, 이 알통.”
“없거든?!”
언젠가의 기시감을 느끼며 처치를 끝낸 카가미는 다 됐다는 의미로 쿠로코의 머리를 콱 움켜쥐었다. 이거 놔요, 하면서도 먼저 떨쳐 내지는 않는 쿠로코를 카가미가 물끄러미 보다 머리를 마구 흩트리고는 손을 놓았다.
“너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엉망이 된 머리를 대충 정리하던 쿠로코의 손이 멈칫 멎었다. 저도 모르게 뱉은 말에 당황하면서도 카가미는 쿠로코의 대답을 기다렸다. 쿠로코는 손을 머리에서 내리고는 카가미를 올려다보았다. 고요한 눈으로 쿠로코가 물었다.
“결정했습니까.”
“……내일 아침까지도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렇군요.”
쿠로코는 조용히 대답하고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다가 주변에 널린 붕대며 가위, 테이프를 정리해 구급함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좀 얌전히 있어야겠네요. 미국은 머니까요.”
그 말에 기껏해야 반나절 거리일 그 거리감이 가슴으로 뚝 떨어지는 것 같아, 카가미는 아무 대답도 돌려줄 수가 없었다.
**
쿠로코는 끝까지 쿠로코였다. 눈물도 최대한 보이지 않으려 했고, 약한 소리에도 뻔뻔하다며 채찍질하면서도 그다운 응원을 보내고. 정말이지 귀여운 얼굴로 귀엽지 않은 말을 하는 게 귀여웠다. 황당한 와중에도 이 가망 없는 사랑은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비행기를 탄 카가미는 헤드폰을 쓰려다 말고 얼굴을 찌푸렸다. 아까 거칠게 잡아 뺀 탓인지 귀 부분이 유난히 덜렁거렸다. 뭐, 그렇게 서두른 가치는 충분했지만. 카가미는 방금 전 쿠로코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앞으로도 계속, 저는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저는 그림자입니다’로 시작해서 ‘저는 당신의 그림자입니다’로 변한 관계에 카가미는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쿠로코의 농구에 그 정도의 존재감을 새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걸로 정말 괜찮은 건가? 쿠로코는 잘 가요라고 하고는 다녀오겠다는 말에는 단 한마디도 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쿠로코는 나와의 인연이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 헤드폰을 타고 흐르는 음악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반나절, 비행기는 착실히 쿠로코와의 거리를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