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편 이어집니다.
흑우 전력 60분 주제 '재회' 받아 썼습니다.
[화흑] 구면이지만 처음 뵙겠습니다 - 2
달력이 9월로 넘어갔는데도 늘어지는 여름은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만 같았다. 카가미는 방과 후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학생들의 무리를 지나치며 체육관으로 향했다. 부 활동 시간에 학교 체육관에 가는 게 얼마만이지? 머릿속으로 헤아려 보려다 곧 그만두었다.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마당에 생각할 거리를 늘려서 좋을 게 없었다.
체육관 앞에 선 카가미는 일단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마침 막 정렬한 농구부원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한순간에 모인 시선이 불편해 무심코 뒷걸음질하던 카가미는 가장 앞줄에 선 부원들의 얼굴에 딱 멈춰 섰다. 딱딱하게 굳은 카가미를 보고 부원들 사이에 한차례 웅성거림이 지나갔다. 그 사이에, 카가미는 앞줄에서도 맨 끝,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음울한 얼굴로 선 부원을 발견했다. 그러자 입을 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것이다.
“쿠, 쿠로코……?!”
테이코 중학교 제1 체육관에 NBA 선수 카가미 타이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카가미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환상의 식스맨은 네, 제가 쿠로코입니다만. 하고 카가미를 올려다보았다. 쿠로코 테츠야? 하고 다시 확인하는 카가미에게 쿠로코는 네, 쿠로코 테츠야 본인입니다. 하고 대답해주었다. 카가미가 멍하니 서있는 동안 1군 안에서도 레귤러가 분명한 부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쿠로콧치, 아는 사이예요?”
“……그럴 리가요.”
“그래도 처음 보자마자 쿠로칭 발견하는 일 거의 없잖아~.”
“그만큼 주의력이 좋아야 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겠지.”
“아니, 카가미 선수는 우리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은걸. 테츠야와는 좀 더 각별한 것 같지만.”
“저는…… 기억에 없습니다만.”
“그럼 카가미 선수에게 물을 수밖에. 실례지만, 테츠야를 어떻게 알고 계시죠?”
주장, 아카시가 깍듯한 존댓말로 물어 왔다. 오스스 소름이 돋는 와중에도 카가미는 망설임 없이 즉답했다.
“그야 쿠로코는 내 그림자니까.”
그 순간 테이코 레귤러들의 표정이, 특히 아오미네와 쿠로코의 표정이 확 굳어지는 걸 카가미도 느낄 수 있었다.
감독이 들어와 NBA에서 뛰고 있는 선수라며 카가미를 새삼 소개하는 바람에 그 이상은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카가미 타이가입니다. 시카고 불스에서 파워 포워드로 뛰고 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정도의 인사말을 끝내자 미리 짜인 대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렇지, 참. 모처럼 쿠로코나 기적의 세대 녀석들의 모교에서 초청해서 강연하러 온 거였어.
당황한 나머지 목적을 까맣게 잊고 있던 카가미는 감독이나 다른 부원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바빴다. 스카우트나 미국 생활, NBA 선수로서 필요한 것 등 생각보다 진지한 질문과 답변이 오갔고, 어느덧 약속한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질문 하나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하자는 감독의 말에, 그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카시가 손을 들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부탁이지만, 주특기인 덩크를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NBA 선수든 뭐든 어디 내 눈으로 확인해봐야겠어’라는 얼굴로 부탁 운운하는 아카시를 보며 카가미는 기가 찼지만 흔쾌히 수락했다. 몸을 풀고 공을 받아 든 카가미는 가볍게 드리블한 뒤 공중을 걷듯이 날아 덩크를 내리꽂았다. 디펜스도 없어 달려가 골을 넣기만 하는 단순한 플레이였지만 등 뒤로 꽂히는 시선은 아플 만큼 따가웠다. 오오, 하는 부원들의 감탄사 속에서 아카시가 다시 요구했다.
“좀 더 보여주세요.”
아카시의 말을 따를 생각은 없었지만, 카가미는 쿠로코에게 공을 던졌다. 모처럼 쿠로코가 있는데 패스를 받지 않으면 손해지. 공을 받은 쿠로코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카가미가 말했다.
“있는 힘껏 던져, 아픈 걸로.”
“……!”
쿠로코는 입을 꾹 다물고는 곧장 이그나이트 패스를 던졌고, 카가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패스를 받아 림에 공을 내던지듯 처넣었다. 호쾌하게 들어간 덩크에 가슴까지 확 뚫리는 것 같아 카가미가 활짝 웃었다.
“역시 네 패스를 받는 게 제일 기분 좋다니까.”
카가미의 말에 감독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당사자인 쿠로코는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얼굴이었다.
강연은 마무리 되었지만 농구부의 연습은 지금부터였다. 주어진 메뉴를 소화하는 것은 은퇴식을 앞둔 3학년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쿠로코만은 감독에게 무어라 이야기하고는 아직 돌아가지 않고 우물쭈물 서있는 카가미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잠깐 얘기 좀 해도 될까요, 하고 체육관을 먼저 나서는 것이었다. 교정 구석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을 때, 카가미는 참지 못하고 불쑥 말을 걸었다.
“그, 괜찮은 거야? 연습 중에 나와도.”
“괜찮습니다. 아까 감독님께 농구부를 그만둔다고 말씀 드린 참이라서요.”
“아. 하필 그 타이밍이냐? 남 힘들 때 훔쳐보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그 타이밍이라뇨?”
“오기와라였나? 그 녀석 학교랑 결승전 치른 뒤 아냐?”
“……어떻게 오기와라 군도 아는 겁니까.”
“너한테 들었으니까.”
“저는 첫 만남인데요.”
“나는 아는 사이라고. 정확히 말하면 고등학교부터지만.”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아무튼 난 고등학교에서 너를 만났고, 나는 빛이고, 너는 그림자고, 같이 농구하고, 그러다 난 NBA 선수가 됐는데 왜 테이코에서 중학생인 너랑 기적의 세대 놈들을 만나는지 이해가 안 된단 말야.”
카가미는 벤치에 등을 완전히 기대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옆얼굴에 쿠로코의 시선이 가만히 닿았다 떨어졌다.
“타임머신이라도 탄 걸까요.”
“아니, 그런 거 탄 기억은 없는데…… 그보다 너 믿는 거야?”
“NBA 선수가 일부러 저를 아는 척하며 속일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 냉정한 말투는 타고났나 보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쿠로코가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처럼. 아, 이 녀석 진짜 힘들 때지. 새삼 떠올리며 심각한 얼굴을 한 카가미에게 쿠로코가 입을 열었다.
“카가미 씨가 정말,”
“씨는 관둬, 생판 남 같고 좀 그러니까. 군으로 됐어.”
“그럼…… 카가미 군이 정말 미래에서 왔다면, 전 결국 농구를 계속하는 걸까요.”
“뭐, 그렇지. 넌 농구 무지 좋아하니까.”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요?”
“죽어라고 한다고. 덕분에 나도 여러 모로 도움 받았고.”
“……정말 꿈같은 미래네요. 카가미 군 같은 빛의 그림자가 된다니, 미래의 저도 자랑스러울 겁니다.”
“어, 그렇게 말해주더라.”
“카가미 군 좀 재수 없네요. 저 앞으로 카가미 군의 그림자 안 해도 될까요.”
“뭣?!”
“농담입니다.”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로 간담 서늘한 농담을 한 쿠로코는 카가미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카가미 군, 미국에는 언제 돌아갈 예정입니까?”
“글쎄, 일단은 10월 초까진 별 예정 없는데.”
“그러면 이번 달까지는 있어주지 않겠어요? 마침 한가해져서요. 그림자로서의 부탁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거절할 도리도 없고, 솔직히 기쁘기도 했다.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일어날 녀석이지만, 알면서도 내버려두긴 맘에 걸리기도 하고. 카가미는 후, 하고 숨을 내쉬고는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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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배경을 9월로 맞춘 이유는 설정병자에겐 너무 기가 막힌 시기라서.... ^^;
성인 쿠로코는 교생실습(일본은 6월 아니면 9월), 카가미는 NBA 휴가(8~10월) 중입니다.
중딩 쿠로코는 8월 말 전중이 끝나고 9월 초 농구부를 그만두려는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