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일 케이크 스퀘어에서 배포한 내용입니다. 갓청←제 인 내용이니 주의.



붉은 가시

 

 

언제부터냐고 물으면 확실히 대답할 수가 없다.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었고, 그럴 듯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함께 한 추억이라고는 짧은 싸움의 기억뿐이고, 마계에서 다시 얼굴을 마주한 뒤로도 사담을 나눌 만큼 친근한 사이가 되진 않았다. 다만 제온·벨은 마왕 갓슈·벨의 쌍둥이 형이자 최측근이었고, 그 인간은 마왕의 파트너였다. 그와 마주칠 기회가 많았던 것이 화근이라고 제온은 생각했다. 말하자면 가랑비에 옷이 젖고 말았다. 갓슈에게 보이는 미소나 따뜻한 말들이 엉뚱한 제온에게도 스며들었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흠뻑 빠져 있었다. 재앙이었다.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패배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버릴 수도 없는 마음이라면 최대한 감출 수밖에. 자존심 강한 제온에게는 최선의 결론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를 마주하기 전엔 늘 숨을 고르고 표정을 굳히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습관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 제온은 문 앞에서 멈춰서는 대신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제의 대상인 타카미네 키요마로는 사흘째 잠들어 있다.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쓰러진 키요마로를 처음부터 심각하게 여긴 것은 갓슈뿐이었다. 다른 마물들은 그저 보나 마나 밤샘 연구라도 했겠지하며 동요하지 않고 키요마로를 업어다 침대 위에 눕혀 이불까지 덮어 줬던 것이다. 하지만 키요마로를 자게 놔둔 지 꼬박 사흘째. 여전히 잠들어 있는 키요마로를 보며 제온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아직도 자고 있냐. 희미하게 초조함이 섞인 제온의 말에 키요마로의 상태 이상에는 필요 이상으로 민감한 갓슈가 옆에서 울먹이며 호소했다.

 

뭔가 이상하네. 아무리 키요마로가 잠꾸러기라도 사흘이나 꿈쩍도 않지는 않네! ‘그때말고는 이런 적 없었단 말일세!”

별다른 증상이나 외상도 없으니까 단순한 수면부족이라고 생각했지만, 사흘이나 자는 건 확실히 이상해.”

티오가 굳은 표정으로 말하고는 자신이 살펴보겠다며 갓슈와 제온을 방 밖으로 쫓아냈다. 방 밖으로 수시로 새어나오는 분홍색 광채를 보며 제온은 팔짱을 낀 채 곁눈질로 갓슈를 살폈다. 기도하듯 깍지 낀 손을 턱 밑에 댄 갓슈는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종교가 없는 마계에도 기도라는 말은 존재했다. 이런 때에도 기도할 줄 모르는 제온으로서는 갓슈가 무엇에 대고 빌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방문을 연 티오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을 부비며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어떡해.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어. 없는데 의식만 안 깨어난단 말이야…….”

티오의 말에 곁에 서 있던 갓슈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파우드의 안에서 키요마로가 한 번 죽어버린 일을 되새기고 있겠지 짐작하며 제온은 공황에 빠진 두 마물을 번갈아 보았다. 갓슈를 비롯해 당시 그의 동료들은 지금까지도 그때의 상흔을 떨치지 못했다. 제온은 온전히 이해할 수도 공유할 수도 없는 감정이었다. 그저 그 무게가 바오우의 형태로 갓슈를 잡아먹을 수 있을 정도라는 것만 겨우 가늠할 수 있을 뿐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갓슈의 얼굴을 보며 제온은 정체도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에 가슴께가 무거워졌다. '설마'로 운을 떼는 생각을 지워버리려 애쓰며 제온은 짐짓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몸에 이상이 없는 거라면 다음은 내가 맡으면 돼. 의식이나 기억 같은 건 내 전문이니까.”

말을 뱉고 나니 오히려 안심이 돼 제온은 어깨의 힘을 풀었다. '답을 내는 자'가 제 일에 대해 모를 리 없고, 그 답을 내지 않았을 리 없었다. 다음은 제온이 키요마로의 머릿속을 읽고 대응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차분한 제온의 태도에 티오와 갓슈도 곧 진정했는지 제온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괜찮겠어? 티오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제온은 대답하지 않고 키요마로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 표정도 그리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는 키요마로가 낯설었다. 적어도 제온 앞에서 키요마로가 이토록 무방비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무방비. 제온은 주먹을 꾹 쥐었다 폈다. 저항하지 못하는 상대의 머릿속을 침범하는 일이 얼마나 저급한지 지금의 제온은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호의를 품은 대상의 속내를 훔쳐보는 건 더욱 켕기는 일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론 괜찮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필요한 일이지. 제온은 심호흡을 하고는 갓슈를 향해 말했다.

 

이번 일로 키요마로가 내게 따져도 갓슈 네가 책임져라."

갓슈의 동의가 면죄부라도 되는 양 다짐을 받는 제온의 말에 갓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키요마로가 무사히 깨어나기만 한다면 뒤는 본인이 책임짐세. 무게가 실린 말투에 제온은 어련하시겠냐, 하고 삐딱하게 대꾸했고, 갓슈는 고맙다며 제온에게 인사를 건넸다.

널 위해서 하는 일도 아닌데 네가 왜.

울컥 치미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제온은 키요마로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손바닥에 힘을 집중하자, 제온의 의식은 단번에 키요마로의 방에서 키요마로의 머릿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

 

의식은 본래 흐르는 물처럼 되어 있다. 제온은 타인의 의식에 접촉할 땐 자신의 의식을 온전한 구형으로 굳혀 휩쓸리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단히 각오한 보람도 없게 키요마로의 의식은 파문도 없이 잔잔했다. 허탈해진 제온은 그대로 키요마로의 의식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꿈조차 꾸지 않는지 키요마로의 의식은 흐르지 않는 호수 같았고, 제온은 그 위에 섬처럼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죽은 의식 속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 같아 제온은 덜컥 겁이 났다. 의식에 직접 접촉해도 반응이 없다면 다음은 기억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의식에 잠기지 않으면 기억을 읽을 수 없단 말이지…….

제온은 숨을 급하게 들이쉬고는 키요마로의 의식 속으로 자신의 의식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앤서 토커의 머릿속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도 깊어서 가라앉는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의식 밑바닥에 닿기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곧 눈앞에 어둠이 펼쳐졌다. 그리고 서서히, 키요마로가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부터 키요마로의 시점으로 눈앞에 떠올랐다.

 

 

제온은 필요하지 않으면 타인의 기억을 읽지 않았다. 의식 밑바닥에 깔린 기억은 소유주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온은 그 감정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생각의 파도를 헤치고 들어가면 감정의 폭풍우를 만나니, 타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쓸모는 있어도 위험하고 피곤한 능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앤서 토커인 타카미네 키요마로의 머릿속을 엿보는 것은 특히 위험할 것이라고 제온은 생각했었다. 이런저런 문제와 생각들로 복잡하고 어지러울 게 틀림없고, 다혈질이니 감정의 폭도 넓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키요마로의 기억을 보면서 제온은 바로 얼마 전까지의 판단에 가위표를 그려 넣었다. 고요한 의식은 그렇다 쳐도, 감정변화도 그리 크지 않았다. 쓰러지면서도 빌린 책 반납해야 하는데…….’ 따위의 시답잖은 생각만 남겼을 뿐, 두려움이나 당혹 따위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올 것이 왔다는 확신만 미미하게 가슴 한편을 누르고 있었다. 키요마로는 이미 이 사태에 대한 답을 얻었던 게 분명했다. 각오를 할 거면 같이 하게 해 줄 것이지. 기대했던 실마리는 잡히지 않아 제온은 되감기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기억을 더 오래된 것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드물게도 와이즈맨의 질린 듯한 얼굴이 한가득 펼쳐져 있는 장면에 의식을 집중하자 영상이 흐르듯 기억이 재생됐다.

 

너 아직도 일하는 건가. 빨리 관두고 정원이나 돌보는 게 나을 텐데.”

관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소소하게 개인 연구만 하잖아. 기껏 있는 머리를 쓰지 말라는 건 세계 차원의 손해라고.”

……네가 그런 말 할 처지냐. 너 전보다도 더 엉망진창이잖아.”

언뜻 폭언으로 들리는 말이었지만 와이즈맨의 눈빛이나 말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제온은 그 와이즈맨이 걱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그런데 대체 뭐가 엉망진창이란 거야. 미간을 찌푸리며 다음 말을 기다리자, 키요마로가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안달한다고 아무는 종류도 아닌데 어쩌겠어.”

네 동료가 마음의 힘을 회복시키는 주술을 쓰잖아. 마계에 왔을 때 시험이라도 해봤나?”

그건 아니지만……너도 알잖아. 내 조각은 돌이킬 수 없어. 한참 전에 임계점을 넘었으니까.”

잠시 주어진 침묵에 제온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마음의 힘, 조각, 임계점. 주어진 키워드를 조합하자 키요마로의 마음의 조각에 이상이 생겼다는 암담한 결론이 쉽게 도출됐다.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는 상황에 제온이 얼어 있을 무렵 와이즈맨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적어도 더 마음 쓸 일은 피해야 했다. 마음의 조각이 산산조각 나는 경우는 본 적도 없어. 네가 어떻게 될지 감도 안 잡힌다.”

앤서 토커로서 얻은 답을 말하자면, 마음이 없는 인간이 될 거야. 감정 같은 게 전부 사라져 버리겠지. 전조도 있을 거고.”

거짓말. 제온은 뿌득 이를 갈았다. 어떤 조짐도 없이 키요마로는 쓰러졌다. 의식은 멈춰버렸지만 감정은 그 밑바닥 기억 속에 그대로 잠겨 있다. 키요마로는 부러 답이 아닌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와이즈맨에게 아주 조금 미안해하는 키요마로의 마음이 제온의 의식을 휘감고 사라졌다.

 

그러니까 내게 이상이 생기고 마음이 없는 인간이 될 때까진 비밀로 해 줘.”

……네 입막음은 지긋지긋해.”

옛날에 날 공격한 대가라고 생각하라고. 조각이 버티는 동안 슬픈 얼굴만 보고 싶진 않아.”

내가 잘못된 일을 하면 모두가 막아줄 테니 괜찮겠지, 하고 너스레를 떠는 키요마로를 끝으로 제온은 좀 더 오래된 기억으로 점점 의식을 돌렸다. 키요마로가 낸 진짜 답이 궁금했다. 깨어나긴 하는 건가. 정말로 마음이 사라지고 마는 건가. 당황하며 기억을 돌리고 돌려도 찾는 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키요마로의 의식에 침잠한 지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제온은 그 답을 찾아냈다.

 

**

 

깨어났는가, 제온! 제온도 이상해 진 줄 알고 무서웠다네!”

키요마로의 머릿속에서 제 의식을 돌리자마자 다짜고짜 끌어안는 갓슈를 제온은 힘주어 밀쳤다. 보조 침대에 누운 채로 지쳐 잠든 티오가 그 소란에 뒤척거리며 으응, 하고 잠꼬대를 했다. 티오가 수시로 키요마로와 자네에게 회복 주술을 걸었네. 나는 왕인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해 분했지 뭔가. 소리를 죽여 설명하는 갓슈에게 제온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켜 구겨진 망토 끝자락을 손다리미했다. 갓슈가 절박한 얼굴로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정말 심하군.”

키요마로의 가슴께를 내려다보며 제온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처음엔 반구의 형태였을 마음의 조각이 말 그대로 산산조각 나 있었다. 붉고 짙은 조각이 군데군데 피딱지가 얹은 것처럼 검게 물들어 가고, 여기저기 닳고 깨지면서 망가져 가는 모습을 줄곧 눈으로 확인했다면 확실히 걱정하지 않고는 못 배겼을 터였다. 제온은 키요마로의 조각에서 눈을 떼고는 갓슈에게 고개를 돌렸다.

 

넌 안 보이지?”

뭐가 말인가?”

이 녀석의 여기에 들어 있는 거.”

키요마로의 가슴을 가리키는 제온에게 갓슈는 심장인가?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바보냐, 티오가 몸엔 이상 없다잖아. 마음의 조각 말이야.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제온에게 갓슈는 고개를 갸웃하다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네. 마음의 조각이 딱 들어맞는 마물과 인간이 파트너가 되어 주문을 쓸 수 있다던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네만, 제온의 눈에는 보이는가?”

나도 평소엔 보이지 않지만,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보여. 키요마로가 쓰러진 건 그 조각 때문이다.”

마음의 조각 때문이라니…….”

키요마로의 가설에 따르면, 마음의 힘을 쓰면 마음의 조각이 닳는다더군. 그리고……왕을 정하는 싸움에서 인간 파트너들은 마음의 힘으로 주술을 쓴단 말이지. 조각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 구조야.”

그렇다면 마물 싸움 때문에 키요마로와 인간 파트너들이 전부 이렇게 된단 말인가?! 마본은 분명히 싸움이 끝나면 모든 피해를 복구한다고 말했었네!”

조각의 피해만은 복구할 수 없는 거겠지. 피해라고 생각지도 않거나. 다른 책주인들 중엔 키요마로 정도의 손상을 입은 인간은 없기도 했고, 인간의 수명은 마물보다 짧으니 다른 녀석들은 웬만해선 죽기 전까지 조각의 영향을 받을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키요마로의 조각은 임계점을 넘었다고 했어. 한 번 죽었으니까.”

죽음이 키요마로의 조각에 새긴 손상은 심각했지만 조각을 보지 못하는 키요마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완전한 구형의 조각으로 마계와 인계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와이즈맨이 키요마로를 마계로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얼마나 성장했는지 봐주겠다며 흥미 본위로 키요마로의 조각을 들여다 본 와이즈맨은 곧 사색이 되어서 키요마로에게 사실을 고했다. 네 마음의 조각이 맛이 가기 직전이다. 그리고 그때 키요마로는 조각에 대한 답을 구했다. 제 조각이 어떤 상태인지,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완전히 깨진 후엔 어떻게 되는지.

 

키요마로의 조각은 산산이 부서졌어. 그래서 깨어날 수 없다.”

…….”

육체는 살아 있지만 의식은 죽은 것처럼 되어서 다시는 움직일 수 없다더군. 육체도 수명을 따르니 키요마로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

해결책은? 키요마로가 답을 내지 않았나?!”

해결책을 구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게 키요마로의 답이었어.”

단순한 직감을 믿고 손을 놓은 키요마로를 제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온과는 달리 갓슈는 키요마로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고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그럼 부서진 조각이라도 붙일 수는 없겠나?”

갓슈의 매달리는 듯한 시선에 제온은 고개를 저었다. 파편이 너무 자잘하게 흩어져서 불가능할 거다. 제온의 말에 갓슈는 푹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는 제온에게 작은 소리로, 내 조각도 보이는가? 하고 물었다. 네 조각은 멀쩡해. 제온의 대답에 갓슈는 고개를 들더니 제온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내 조각의 반을 키요마로에게 주겠네. 키요마로는 원래 내 반쪽이니 내 마음이라면 키요마로와 나눠 가질 수 있을 걸세. 그러면 키요마로가 다시 깨어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반의 반쪽짜리 조각으로 너도 키요마로도 얼마나 버틸 수 있겠냐.”

……그렇다 해도 머지않아 키요마로는 내게 받은 조각을 돌려줄 걸세. 그러면 나는 다시 반쪽 조각으로, 키요마로의 마음과 함께 기나긴 세월을 살아가겠지. 내게 그 이상의 보상이 어디 있겠는가. 도와주게, 제온.”

만약 일이 잘못되면…….”

잘못될 리 없네. 이건 비밀이네만, 키요마로는 지금껏 내가 빌었던 것 모두를 이뤄 주었네. 이번에도 키요마로에게 빌면 틀림없이 잘 될 걸세.”

환하게 웃어 보이는 갓슈를 따라 제온은 낮게 웃었다. 네 종교는 키요마로였구나. 비참했다. 동생에게 이길 수가 없었다. 애정의 크기도, 함께 한 시간도, 함께 할 시간도 전부 져 버렸다. 그렇다고 키요마로를 그대로 놔두기에는 제온의 마음도 가볍지는 않았다.

 

……그럼 시도는 해 보자. 어떻게 돼도 난 모른다.”

걱정 말게나!”

갓슈는 가슴을 활짝 펴며 미소 지었고, 제온은 타인의 조각에는 처음으로 손을 뻗었다. 가슴 안에 들어 있던 조각은 제온의 손으로 천천히 이끌려와, 가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손끝에 닿았다. 볼 수 있는 자는 만질 수도 있는 건가 생각하며 제온은 갓슈의 반구를 양손가락으로 집어 힘을 실었다. , 억눌린 신음을 뱉는 갓슈에게 아프냐고 묻는 대신 제온은 조각을 집은 손가락에 좀 더 힘을 주었다. 똑 부러지는 소리가 날 때까지 갓슈는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다. 됐어. 제온의 말에 갓슈는 헉, 하고 숨을 내뱉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이라는 게……이렇게 부러지기 쉬운 건 줄 몰랐네.”

그러게. 힘 좀 준다고 갈라질 줄이야.”

내 조각도 이 정도인데 키요마로는 지금껏 버텼으니 대단하지 않은가.”

제온은 그럴지도, 하고 긍정하고는 갓슈의 조각 반쪽을 손 안에 넣었다. 남은 반쪽은 제온이 손을 떼자 천천히 갓슈의 가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럼 여기 있는 네 조각을 키요마로에게 넣겠다.”

거기 내 조각이 있는가?”

꺼내도 안 보이는 건가. 아픈 건 괜찮냐.”

희미하게 아프지만 이 정도쯤이야 버틸 만하네. 좀 허하긴 하네만.”

반이 내 오른손에 있으니까 허하겠지. 그럼 넣는다.”

제온이 키요마로의 가슴 위로 왼손을 뻗자 조각 부스러기들이 천천히 가슴 위로 빠져나왔다. 그 위에 갓슈의 조각 반을 올려놓기 전에, 제온은 검붉은 색으로 빛나는 부스러기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네 영혼의 반쪽도 뭣도 아니지만, 그래도.

 

**

키요마로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가슴을, 새로 주어진 조각의 위를 쥐어뜯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떠 머리맡에 선 갓슈와 눈을 맞췄다.

 

키요마로!”

……갓슈 너 또 무모한 짓 했구나.”

내가 다시 깨어난 걸 보면. 인사도 없이 핀잔부터 주며 이맛살을 찌푸리는 키요마로에게 갓슈는 웃으며 키요마로는 언제나 무모하지 않은가, 하고 받아쳤다. 키요마로는 웃어넘길 일이냐, 하고 한숨을 쉬면서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 네가 날 그대로 놔둘 리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될 줄 예상하고 있었는가?”

내가 답을 내지 않아도 그게 끝이 아닐 거라는 예감은 들었거든.”

그래도 그동안 숨겨서 미안하다, 하고 사과하는 키요마로를 갓슈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키요마로는 바보 멍청이일세!! 하고 외치며 와락 끌어안았다. 키요마로는 얌마, 무거워! 하고 짐짓 화난 듯 말하면서도 갓슈를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그 소란에 끙, 하고 몸을 뒤척이던 티오가 보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고, 키요마로는 티오의 눌린 머리를 보면서 픽 웃었다.

 

키요마로! 드디어 깨어났구나!!”

그래, 티오. 고생 많았다. 고마워.”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말을 흐리며 훌쩍이는 티오를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던 키요마로가 곧 고개를 돌리고는 먼발치에 서 잔뜩 인상을 쓴 제온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제온 너도 고생했겠다.”

……별로.”

내 안에 든 거 갓슈 조각 맞지? 네가 심었어?”

그래. 어명을 거역할 수는 없으니까.”

딱딱하게 대꾸하는 제온을 보던 키요마로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와 제온의 가슴에 닿았다 떨어졌다. 제온은 키요마로의 시선에 움찔 놀라면서도, 애써 숨을 고르고 표정을 굳히고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뭐야, 하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제온을 빤히 들여다보던 키요마로는 곧 제 가슴을 내려다보고는 흐음, 하고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뭔가 허전한데.”

기분 탓이겠지.”

이것도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너 좀 아파 보여.”

……시끄러.”

주인 몰래 훔쳐와 박아 넣은 검붉은 파편이 제온의 가슴 안을 쿡쿡 쑤시고 있었다.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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