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꿈에 그가 찾아왔다.



  전에 타르라크가 말했던가,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그렇다면 내 무의식에 그의 자리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악몽에 그가 등장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내 꿈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그는 인사말도 없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칙칙하구나, 하고 웃었다. 조명도 사물도 없는 어둠만이 늘 내 악몽의 배경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칙칙하기론 당신도 만만치 않지. 퉁명스러운 대꾸에 그는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말했다.


  “당장 칼부터 들고 달려들 줄 알았더니 핀잔이라니 좀 차분해졌군.”

  “인간은 나이를 빨리 먹거든.”

  “그랬지……조금 더 일찍 찾아올 것을.”

  “그래봤자 달가운 얼굴도 아니니까 어떻게든 꿈에서 깨려고 했겠지.”

  “밉살맞게 구는 건 여전하구나.”

  내게 싫은 내색 한 적 없으면서 잘도 말하긴. 그는 내 투덜거림에 소리 내어 웃더니 손을 불쑥 뻗었다.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몸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려 하자 그는 천천히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내가 너를 해칠 리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경계하는 것은 네 삶이 여전히 어렵기 때문이겠지.”

  “당신이 나를 해치지 않는다 해도 내가 손을 허락할 이유는 없어.”

  “오랜만에 만났으니 칭찬이라도 해 줄 생각이었다. 잘 견디고 있구나, 하고.”

  아무래도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모양이었는지 허공을 휘적휘적 저어 보이는 그의 손짓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무안해졌는지 그는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감응 의식은 거부하더니 용기사가 되었다지?”

  “원한 건 아니야.”

  “게다가 검은 용기사라니. 나와의 계약을 잊은 건 아니겠지.”

  “그 계약도 내가 원한 건 아니었지.”

  “너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원하진 않았다면서 잘도 움직이는구나. 전엔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 보이더니. 네가 움직일수록 네 삶이 너를 옥죄는 것을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닌지 그의 말은 대개 옳았다. 그는 보다 멀리, 넓게 볼 줄 아는 자였고 나는 내 인생조차 분에 겨운 인간이었다. 내 판단보다 그의 판단이 정확하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나도 알아. 내가 움직일수록 일은 점점 나쁜 방향으로 진행되지. 하지만 멈추려고 해도 희망이든 절망이든, 무언가가 날 움직이게 해. 결국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더군.”

  “그래……아마도 네 속의 불덩어리를 가라앉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겠지. 누구의 것보다도 시뻘겋고 뜨거운 불덩어리가 네 속을 태우고 있으니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를 수밖에 없는 것일 터.”

  그가 내게 건네는 말엔 종종 연민 같은 것이 묻어 있다. 거기에 대고 나를 내려다보지 말라며 일일이 화를 내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그렇잖아도 내겐 지치고 피곤한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정말로 잘 견디고는 있지만, 순순히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나를 보면 마음까지 노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직은 나 자신까지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싶지는 않지만.


  “그보다 역시 차분해졌구나.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감개가 무량한 듯 감탄까지 섞인 그의 말투에 나는 문득 예전 일을 떠올렸다. 확실히 나는 그를 우호적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내가 줄곧 거스르려 했던, 아버지가 말한 ‘정해진 운명’이 그와 얽혀 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계약의 제물이었던 나를 그는 ‘드래곤의 계약자’라고 불렀고, 그가 내게 요구한 것은 단지 감응 의식에 협력하는 것뿐이었다. 믿었던 것들에게 배신당하고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는 것이 내 운명이라면, 그는 내 운명에 얽혀있지 않았다. 따라서 내가 그를 증오할 명분도 사라졌다. 그 구구절절한 이유를 굳이 설명할 마음은 없어서, 그에게 화를 내지 않는 또 다른 이유를 입에 담았다.


  “살아있는 것이 꿈에 나온 게 오랜만이라서. 매번 죽은 것들만 꿈에 나와. 인간이든 포워르든, 가족이든 적이든.”

  “……그건 참 힘든 일이겠구나. 그런데 어째서 내가 살아있는 것이라 확신하느냐.”

  “죽지 않았을 거란 건 대충 알고 있었고, 꿈에 나온 것들은 나와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지 않으니까. 덤벼들거나 울거나 화내거나 소리치거나……아무튼 당신과는 좀 다르지.”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꿈에서 만들어 낸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내 꿈에 찾아온 거야. 내가 위로나 동정 따위를 바랐을 리가 없어. 이렇게 편안한 꿈을 바랐을 리도 없고.

  내 말에 그는 혀를 쯧쯧 찼다.


  “꿈에서마저 자유롭지 않으면 더 빨리 지쳐갈 것이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몸이야. 그러니까 이제 찾아오지 않아도 돼. 당신의 걱정 따윈 필요 없어.”

  만사에 초연한 척 구는 주제에 그가 나를 도와주려는 것을 알고 있다. 악몽에서나마 나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겠지. 하지만 사라진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악몽뿐이다. 때문에 그의 호의를 거절하자 그는 잠시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가 긴 한숨과 함께 말을 토해냈다.


  “그렇다면 적어도 오늘은 푹 자 두어라. 네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아도 네가 겪을 괴로움은 죽음보다도 무겁지 않느냐.”

  죽음의 신이라는 자의 입에서 나오니 못 견디게 무서운 예언인데, 하고 가볍게 웃으면 그는 대답 대신 다시 내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긴장해 굳어버린 내 어깨를 달래듯이 툭툭 두드렸다. 그 손길을 굳이 치워내지 않자, 곧 그의 다른 손이 눈앞을 슬그머니 가려 버렸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 뜨끈하게 열이 오른 손바닥의 감촉 같은 것을 빼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악몽조차 쫓아오지 않는 완벽한 어둠이었다.


  마치 죽음에 감싸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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