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일 케이크 스퀘어에서 배포한 내용입니다.



너뿐이야

 

 

1

“눈이 오는군요.”

피시스의 설원 위에 먼 대륙의 변두리를 겹쳐 보듯 눈을 가늘게 뜨며 타르라크가 중얼거렸다. 타르라크는 겨울이 끝없이 반복되는 그곳에 아직도 갇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루에리는 그의 옷깃을 대신 여며주고는 곧 그칠 거야, 하고 힘주어 말했다. 피시스의 눈은 눈보라가 되어 휘몰아치다가도 어느 순간 뚝 그치곤 했다. 소리까지 삼켜버리며 한결같이 소복소복 쌓이기만 하는 시드스넷타의 눈과는 달리 변덕스러웠다. 피시스에 뿌리를 내린 이들에게는 그 변덕이 가혹할 뿐이었지만 타르라크는 오히려 반가운 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친다는 걸 알면 눈이란 것도 나쁘진 않지요. 타르라크의 입가에 입김이 하얗게 퍼졌다.

루에리가 타르라크를 따라 이리아로 건너온 지도 며칠째였다. 그사이 타르라크는 루에리와 블랙 드래곤 바펠세파르의 계약을 주선했다. 물론 드래곤과의 계약에 팔린 적이 있던 루에리에겐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고, 제 잘난 맛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바펠세파르의 성정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루에리가 순순히 그와 계약을 맺은 것은 타르라크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계획 수행에 필요한 힘입니다. 당신이 싫다면 할 수 없지만……. 멋대로 블랙 드래곤 앞까지 끌고 갔으면서 타르라크는 뒤늦게 말끝을 흐렸다. 뭘 이제 와서. 루에리는 그 자리에서 계약을 맺었고, 타르라크는 그에게 검은 용기사라는 뻔한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는 이번엔 화이트 드래곤 랑그히리스를 소개하겠다며 기어코 피시스까지 끌고 온 것이다.


“랑그히리스와 만난 뒤에는 소울스트림의 힘을 빌릴 겁니다. 대가는 전에 설명한 대로입니다. 괜찮겠습니까?”

“그래.”

“그다음 밀레시안과 아드니엘이 접촉하지 못하도록 수를 쓰면 일이 좀 수월해지겠지요.”

타르라크는 차근차근 앞으로의 일을 설명해주었다. 나야 하자는 대로 도와줄 뿐이니까 굳이 설명 안 해도 괜찮은데. 루에리는 사람 서운하게 할 생각을 꾸역꾸역 속으로 밀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루에리. 문득 생각난 것처럼 타르라크가 말을 꺼냈다.


“알고 있죠? 사랑합니다.”

타르라크의 입에 붙은 말이었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말에 쭈뼛거리는 루에리를 향해 타르라크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마구 날리던 눈발은 어느새 사그라져 있었다.



타르라크의 사랑 타령은 재회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동안의 회포를 풀던 중에 루에리는 친우가 말을 놓지 않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꼬마 숙녀에게도 꼬박꼬박 높임말을 쓸 만큼 타르라크의 말투는 정중하긴 했다. 하지만 동갑내기인 루에리에게는 편하게 반말을 썼을 터였다.


“그런데 왜 존댓말을 쓰는 거야? 낯간지럽게.”

그동안의 시간만큼 거리가 생겼나? 괜히 서운해진 루에리가 뚱하게 묻자 타르라크는 뜬구름 같은 말을 뱉었다.


“낯간지러우라고 쓰는 겁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자니 타르라크는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루에리에겐 돌려 말해봤자 의미가 없죠. 타르라크의 중얼거림에 울컥하면서도 부정할 수 없어 루에리는 꾹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타르라크의 입매가 곧 단단해졌다. 그리고는 루에리에게는 놀랄 만할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에게 친우로 남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저를 얼마가 지나든 변함없이 편안한 친구로 생각하겠지요. 그러니 이렇게나 저를 기다리게 하고도 웃는 낯으로 찾아올 수 있었을 겁니다.”

“……!”

“그동안 저는 당신을 생각했고, 당신을 찾았고, 하염없이 당신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억울해지더군요. 돌아오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을 무작정 믿고 기다리는 제가 바보처럼 느껴졌고요. 그래서입니다, 루에리. 나는 당신에게 친우 이상의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자꾸만 제가 신경 쓰여서, 당신이 어딜 가도 제게 금방 돌아올 수 있도록.”

루에리는 눈을 부릅뜨고 타르라크를 마주보았다. 간담 서늘한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타르라크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고 낯설었다. 함께 던전을 누비던 19살의 친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앞에는 20대의 낯선 청년만이 남았다. 얼이 빠진 루에리에게 타르라크가 확인 사살을 했다.


“사랑한다는 말로 묶으면 제 곁에 머물러주겠습니까?”



물론 루에리가 그 기묘한 구애에 응했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루에리가 기억하는 타르라크는 드루이드의 길을 걷는 자답게 고지식했었다. 여성의 마음도 거절하는 마당에 동성 친구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속삭일 리 없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루에리는 저도 모르게 타르라크의 눈치를 살폈고, 트리아나의 행방을 쫓는 중에도 틈틈이 시드스넷타에 들러 상황을 보고했다. 정말로 사랑한다는 말에 묶이기라도 한 듯이. 그러면 타르라크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돌아서는 루에리에게 버릇처럼 고백하곤 했다.

루에리, 사랑합니다.

그 말을 ‘빨리 돌아오세요.’로 치환하며 애써 어색함을 쫓는 루에리에게 타르라크는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었다.



2

루에리에게 가족애와 동료애 외의 ‘사랑’은 연이 없는 이야기였다. 트리아나가 제게 연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동경이나 동질감, 마음 붙일 곳에 대한 갈망이 섞여 있었기에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은 없었다. 애초에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데 고백이 와닿을 리가 없었고, 타르라크 역시 대답을 요구한 적이 없으니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한번은 불편함을 못 이긴 루에리가 먼저 타르라크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넌 나랑 뭘 하고 싶은 건데? 루에리의 물음에 타르라크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꽤나 순진하게 묻는군요. 궁금합니까? 장난기 섞인 타르라크의 말에 루에리는 솔직하게 긍정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아직은 말할 수 없습니다.’였다.


“왜?”

“당신이 도망치면 안 되니까요.”

대체 내게 뭘 원해서 저러나 기가 막힌 루에리가 타르라크를 빤히 바라봐도 가르쳐줄 생각은 없다는 듯 타르라크는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그래서, 루에리가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은 것은 아마도 타르라크가 생각하는 ‘도망치지 않을 상황’이 된 다음이었다.



트리아나의 죽음을 겨우 받아들인 루에리에게 타르라크는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는 황금 사과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황금 사과가 제 목적은 아니지만, 계획을 진행하는 중간 발견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수시로 함께하기를 제안했던 타르라크였다. 노골적인 떡밥임을 알면서도 덥석 문 루에리에게, 타르라크는 재회한 뒤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내가 계획에 참여한다는 게 그렇게 좋아? 루에리가 가볍게 묻자 타르라크가 말했다.


“당신은 모를 겁니다. 제가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예상보다 훨씬 묵직한 대답이었다. 말문이 턱 막힌 루에리를 향해 타르라크는 예전 일을 꺼냈다.


“전에 물었었죠. 왜 사랑한다고 말하는지, 대체 당신에게 뭘 바라는지. 당신은 제가 바라는 게 있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착각한 모양입니다만, 실은 순서가 반대입니다. 사랑하니까 바라는 게 생긴 겁니다.”

뭐가 다른데? 어리둥절한 루에리의 얼굴을 보며 타르라크는 좀 질릴지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만, 하고 운을 뗐다.


“저는 오랫동안 시드스넷타에서 혼자였습니다. ……변함이 없는 곳입니다. 멈춘 시간 속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아 외롭고 괴로웠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그 중에는 저를 사랑해준 이에 대한 것도 있었습니다.”

타르라크에게 반해 포워르를 배신한 서큐버스에 대해서는 루에리도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사제가 되어 사랑의 신 라이미라크를 섬기고 있다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타르라크를 향해 지고지순한 사랑을 바치고 있다고.


“하지만 루에리, 제 사랑은 그녀의 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서로를 위하는 아름다운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요. 자꾸만 바라게 되는 겁니다, 오직 당신에게만. 당신이 저를 특별하게 여겨 제 곁을 떠나지 않기를. 아무리 어렵고 위험한 길이라고 해도, 당신이 늘 함께하며 외로움을 채워주기를.”

“친구라서 그런 거 아냐? 함께 있으면 든든하니까…….”

옛날 여신을 찾으러 떠났을 때처럼. 루에리의 말에 타르라크는 ‘그때는 확실히 친우 이상의 감정을 품지는 않았습니다만,’ 하고 긍정하면서도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며 선을 그었다.


“그때 전 당신도 마리도 그렇게 위험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잘 알고 있지요. 당신도 알겠지만 이번 계획은 꽤 험난할 겁니다. 그런 일에 당신을 굳이 끌어들이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그게 뭔데?”

“죽는 순간에 곁에 있어 주길 바라는 이가, 제게는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이야기입니다만……당신은 이런 저를 경멸합니까? 타르라크의 속삭임에 루에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타르라크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함께하고 싶다는 절절한 말에 토를 달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3

타르라크가 소개한 랑그히리스는 바펠세파르와는 달리 비교적 귀족적인 드래곤이었다. 드래곤 특유의 오만함은 있었지만 언행에 품위가 있었다. 짧게 인사를 마친 루에리를 대신해 타르라크가 랑그히리스에게 설명했다. 이 자는 제 유일한 사람입니다. 이번 계획을 돕기 위해 블랙 드래곤 바펠세파르와 계약을 맺었으니 ‘검은 용기사’라고 기억하면 됩니다. 타르라크의 말에 랑그히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낙원 외에는 초연한 척하더니 너도 인간은 인간이구나. 걱정하지 않아도 드래곤의 계약자를 함부로 대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그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도움을 구하겠습니다.”

타르라크는 태연히 대꾸하고는 랑그히리스에게 얼마간의 작별을 고하며 돌아섰다. 그 뒤를 루에리가 한 발짝 늦게 쫓았다. 설원에 발자국을 푹푹 남기며 걷던 루에리가 문득 타르라크를 불렀다.


“그동안 생각해봤는데, 난 아무래도 영 모르겠어. 사랑인지 뭔지 해본 적도 없으니까. 난 네가 뭔가 해주길 바라지도 않고, 내 곁에만 있길 원하지도 않아. 그래서 너한테 돌려줄 대답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거든?”

타르라크는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깊은 녹색의 시선은 루에리를 꼭 붙잡고 있었다.


“아까 랑그히리스에게 날 ‘유일한 사람’이라고 소개했었지.”

듣는 순간 명치를 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히는 말이었다. 타르라크는 그랬었지요, 하고 이번에는 소리 내어 대답했다.


“제가 기다릴 사람은 당신뿐이었습니다. 제게 재회를 약속한 것도 당신뿐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제가 사랑할 사람도 당신밖엔 없지 않겠습니까.”

“있잖아,”



루에리는 급하게 말을 끊고는 타르라크를 직시했다.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실은 알고 있다. 포워르에게 당한 타르라크의 누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리안도 아버지도 트리아나도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있다’ 따위의 애매한 말을 철석같이 믿기엔 루에리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그럼에도 타르라크와 함께하는 이유를, 루에리는 이제야 말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더 잃고 싶지 않아. 네 곁에서 너를 돕고, 너를 지키고 싶어. 네가 죽는 순간에 옆에서 구경만 할 생각도 없어. 내게도 너는 내게 남은 유일한 사람이니까.”

타르라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에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 눈에 일말의 기대감이 섞이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며, 루에리는 처음으로 타르라크의 마음에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러니까 아마 내게도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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