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편입니다.
흑우 전력 60분 주제 '재회' 받아 썼습니다.
[화흑] 구면이지만 처음 뵙겠습니다 - 5 (完)
오랜만에 모교 교문 앞에 선 카가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솔직히 좋은 기억은 없었다고 해도 좋은 학교였다. 중학교 2학년, 중간에 전학 온 카가미는 농구부에서도 교실에서도 줄곧 이방인이었다. 졸업할 때까지도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던 중학 시절을 카가미는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성인이 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예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있던 중학교를 굳이 찾은 이유는 쿠로코, 그러니까 테이코 중학교 3학년 쿠로코와의 대화 때문이었다.
“몇 개월 뒤에는 저도 카가미 군과 만나게 될 텐데, 지금 그는 어떻습니까?”
“……어어?”
뜬금없는 질문에 카가미가 멍하니 반응하자, 쿠로코는 답답한 듯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지금의 카가미 군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지, 무사히 세이린에 진학할 것 같은지, 제 존재를 알고 있는지 말입니다. 카가미 군이 과거에 왔다면 분명 카가미 군의 중학교에는 3학년인 카가미 군이 있을 것 아닙니까. 제가 세이린에 입학하면 만나게 될 텐데, 어떨지 궁금해서요.”
“아, 그러고 보니…….”
“안 만나본 건가요?”
“어, 그보다 중학생인 내가 있을 거란 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
어떻게 그런 걸 잊을 수 있는지 믿기지가 않는다는 얼굴로 쿠로코가 빤히 올려다보는 것에 카가미는 민망해졌다.
“어, 어차피 과거의 나는 나니까 별로 궁금하지 않다고! 처음 보는 중학생인 네 쪽이 더 궁금하면 궁금했지!”
“그래도 과거를 아니까 더 만나고 싶진 않습니까?”
“나랑 만나서 무슨 말을 하라고?”
“……복권 번호라든가?”
과연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카가미는 애초부터 복권 당첨 번호를 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중얼거리는 카가미에게 잘난 척입니까, 하고 부루퉁한 얼굴을 하면서도 쿠로코는 이 이상한 대화를 더 이어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시험 문제를 찍어준다거나, 무슨 경기에서는 어떤 선수를 조심하라거나, 그 행동은 무조건 못하게 하라거나…… 할 말이라면 여러 가지 있지 않습니까.”
다분히 본인의 후회가 비치는 말이었다. 하긴, 이거 이겨내려면 이 녀석도 앞으로 여러 일을 겪어야겠지. 짠하게 생각하면서도 카가미는 섣불리 위로하는 대신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뭐, 너랑 무사히 만나려면 입시 문제 정도는 알려줘도 괜찮겠네.”
“카가미 군, 솔직히 기억도 안 나잖습니까.”
“……윽.”
아무튼 그런 대화를 나눈 뒤에, 카가미는 중학생인 자신을 마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쿠로코가 지적한 대로 입시 문제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지만, 중학 시절의 암담함을 생각하면 위로 한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널 어떻게든 해줄 사람이 곧 나타날 거라고.
카가미는 교정에 들어서 교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는 우중충하고 우울하게만 보였던 학교가 지금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아서,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개는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라 여기저기 흩어진 학생들의 시선이 카가미에게 모였다 떨어졌다. 중학생 카가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카가미를 카가미의 형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점심은 거의 뒤뜰에서 빵 먹었었지, 기억을 더듬으며 교사 뒤편을 향하면, 건물 벽에 기대 앉아 빵 봉지를 뜯는 앳된 카가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진짜로 있었구나.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카가미가 어이, 하고 큰 소리로 카가미의 시선을 끌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턱 하고 카가미의 팔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소스라치게 놀란 카가미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상대방은 카가미를 문답무용으로 뒤뜰과는 반대방향인 교정 구석으로 서둘러 끌고 갔다. 어, 어어, 하고 한심한 소리를 내며 가슴께에나 오는 상대방에게 마구 끌려가면서도 어쩐지 싫은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카가미는 아무 근거도 없는 예감에 휩싸였다.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크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기억하는 것과 거의 같았다. 자기보다 훨씬 덩치 큰 상대에게 한마디도 안 지고, 주먹질도 불사하고, 뻔뻔한 태도로 마구 휘두르고. 그 무모하고 당당한 모습이 지금 이 순간과 겹쳐져, 상대방이 나무 그림자에 숨듯이 자리하고 멈춰 섰을 때 카가미는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쿠로코……!”
성급한 말투에 잠시 움찔한 상대방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쉰 뒤 몸을 틀어 카가미 쪽을 향했다. 그러고는 아주 차분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카가미 군, 단순한 것도 정도가 있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과거를 헤집고 돌아다니면 안 되지 않습니까.”
몇 주간 질리지도 않고 마주한 시선이 좀 더 높은 각도에서 카가미에게 닿았다.
아아, 내가 알지만 모르는 ‘나의’ 쿠로코다.
끓어오르는 충동에 몸을 맡긴 채 카가미는 눈앞의 쿠로코를 와락 끌어안았다. 요 몇 년 서로의 일상에 치여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서 과거로 잊혀가는 줄 알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북받치는 감정에 으스러져라 하고 쿠로코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면, 쿠로코는 입으로는 아픕니다, 떨어지세요 하면서도 마주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고는 얼마 뒤 몸을 떨어트린 카가미에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계속 보고 있었지만, 보고 싶었습니다.”
상대방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게 이렇게나 가슴 벅차는 일일 줄 미처 몰랐던 카가미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저는 교생 실습으로 왔습니다. 설마 제가 한 달간 맡게 된 반에 카가미 군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요.”
“나는 테이코에 초청 강연이 있었는데…… 설마 중학생인 네가 있을 줄은 몰랐다고.”
“이쪽의 카가미 군이 3학년이니 저도 3학년이겠군요. 이 시기라면 저는 한참 방황하고 있었는데…… 이쪽의 제가 부럽네요.”
“어? 왜?”
“가장 힘들 때 카가미 군이 곁에 있어줬잖아요. 분명히 큰 힘이 됐을 겁니다.”
“중학생인 너는 그런 소리 조금도 안 했다고.”
“중학생이잖아요. 이쪽의 카가미 군도 약한 소리는 조금도 안 합니다.”
쿠로코에게 중학교 3학년 카가미 타이가의 이야기를 듣는 건 낯간지럽기도 하고 자꾸만 켕기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학부형에게 학생 이야기를 하듯 ‘쿠로코 선생님’의 얼굴로 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쿠로코는 곧 카가미가 잘 아는 ‘쿠로코 테츠야’의 얼굴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이쪽의 카가미 군을 보면서 계속 생각했습니다. 카가미 군을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하고. 툭하면 우물쭈물하고 미숙하지만, 그렇기에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카가미 군처럼 미래의 일을 마음껏 떠벌리거나 과거의 자신을 만나러 가는 짓은 안 했습니다만……”
“거 미안하게 됐네.”
“아무튼, 저도 이쪽의 카가미 군을 혼자 놔둘 수 없었던 건 사실이니까요. 중학생인 카가미 군을 볼수록 제가 아는 카가미 군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카가미 군이 찾아와 줘서 기쁩니다. 역시 지금도 제 빛은 카가미 군이에요.”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로 기쁜 듯이 웃는 쿠로코를 보자 가슴이 벅차, 카가미는 말할 생각이 없던 이야기까지 더듬더듬 털어놓고 말았다.
“나도 계속 너를 보고 싶었어. 네가 날 잊었을까 무서웠지만…… 그래도 이번에 초청 강연을 다녀오면 이걸 핑계로 너랑 만날 생각이었어. 테이코에 다녀왔다고, 거기 애들 건방지지만 대단하다고, 네 중학교 시절도 그랬냐고…… 뭐 그런 얘기라도 할 수 있을까 해서. 아아, 아무튼 내 말은…… 훨씬 전부터,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난 계속 널 좋아했어! 네가 계속 내 그림자라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힘낼 수 있었어. 아마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말 못 꺼냈을 것 같지만…….”
“패기가 없네요.”
“시끄러워!”
기세를 타 고백까지 해버린 카가미는 쿠로코의 말에 볼멘소리를 내뱉었지만 가슴은 두방망이질하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거절해도 패기 있게 밀어붙여 주지, 속으로 다짐하며 쿠로코의 대답을 종용했다.
“그래서, 넌 어떤데?”
“뭘 말입니까? 제가 먼저 말했잖아요. 카가미 군을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고요.”
“어?! 그냥 호감 얘기하는 거 아니었어?”
“안타깝게도 저도 패기가 부족해서 모호한 단어를 썼나 봅니다. 정정하겠습니다. 저야말로 훨씬 전부터, 당신이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계속 카가미 군한테 푹 빠져있습니다.”
이제 됐냐는 듯 의기양양한 쿠로코의 얼굴빛에 카가미는 다시 한번 쿠로코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꿈만 같아, 속삭이는 카가미에게 현실이 더 굉장한 법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쿠로코가 꿈결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흐릿……?
“어어?!”
“뭡니까. 귓가에 소리치지 마세요, 카가미 군. ……아.”
무심코 소리를 지르는 카가미에게 한마디 하던 쿠로코도 곧 탄성을 뱉었다. 서로의 몸이 반투명하게, 심령사진에나 나올 법한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실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점점 더 희미해지는 서로를 보며 아연해진 둘 중, 먼저 냉정을 되찾은 쪽은 단연 쿠로코였다.
“……만약 서로 고백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난 거라면, 이젠 볼 장 다 봤다는 걸까요.”
“응? 그럼 돌아가는 건가?”
“일이 잘되면 그렇겠죠. 안되면 카가미 군도 저도 사라져 버릴지도요.”
“불길한 소리 하지 마!”
가뜩이나 존재감이 없는 마당에 이제는 거의 배경에 녹아든 쿠로코의 의미심장한 농담에 언성을 높이면, 쿠로코는 후후 웃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면 좀 더 희망적인 소리를 해볼까요. 무사히 돌아가면 데이트합시다.”
“좋아, 죽어도 돌아가자.”
죽으면 못 돌아가는데요, 하고 실없는 소리를 하는 쿠로코의 목소리도 어쩐지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불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태연한 쿠로코를 보니 어쩐지 마음이 든든했다. 정말이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침착하다니까, 감탄하던 중에 새로운 문제가 불쑥 떠올라 카가미는 아쉬움을 담아 중얼거렸다.
“아, 이대로 돌아가면 여기의 너랑은 작별 인사도 못 하겠는걸.”
그러자 쿠로코는 단 한마디로 카가미의 미련을 지워주는 것이었다.
“저도 못 했지만…… 괜찮지 않을까요. 몇 달 뒤면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요.”
**
교생 쿠로코 선생님은 그 존재감처럼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작별 인사 하나 없이. 그런데도 아무도 쿠로코를 찾지 않았다. 학생들은 물론 담임조차 쿠로코의 쿠 자도 꺼내지 않아서,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인 것 같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쿠로코에 대해 묻고 싶지는 않아서 카가미는 침묵했다. 스스럼없이 자기 파트너를 빛이라고 부르던 그 진지한 낯빛을 간간이 떠올리던 사이, 혼자인 시간은 그렇게 묵묵히 흘러갔다.
비슷한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보다 편차치도 더 높은 세이린을 선택한 이유는 그 허깨비를 붙잡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긴, 벌써 졸업해서 곧 선생이 될 사람의 모교에 입학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마는. 자조하면서도 벼락치기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세이린이 겨우 2년 된 신설 고교인 줄 누가 알았겠냐고!
입학식에서 겨우 알게 된 사실에 카가미는 홀랑 속아버렸구나 싶었다. 하지만 고교 시절 농구부였다, 세이린을 언급했다는 단편적인 정보를 한데 엮어 ‘쿠로코 선생님은 세이린 농구부 출신’으로 믿어버린 건 카가미 자신이었으니 누굴 탓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쿠로코가 무심코 던진 힌트를 놓칠 생각은 없었기에, 농구부에 입부서를 내는 데 주저는 없었다. 자기를 어떻게든 해줄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카가미는 어느 순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세이린 1학년 농구부원으로서 처음 체육관에 들어가 감독의 말에 따라 윗옷을 벗고 가만히 섰을 때였다. 카가미의 귀에, 감독의 중얼거림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 중에 쿠로코 군이 있었나?”
눈이 번쩍 뜨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일 뿐일 텐데, 쿠로코라는 울림이 가슴을 술렁거리게 만들었다.
- 저는 역시 당신과의 대결은 내년으로 아껴두고 싶으니까요.
스쳐 지나가듯 들었던 말이 왜 하필 지금 떠오르는지 카가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지금까지 기척도 없었던 이가 손을 들고 “쿠로코는 저입니다.” 하고 대답했을 때, 카가미는 숨이 턱 멎고 말았다. 카가미의 기억에만 남은 ‘쿠로코 선생님’보다는 앳된 얼굴이었지만 다른 누구일 리도 없었다. 낯설지만 낯익은 쿠로코 테츠야가 카가미와 눈을 마주쳤다. 있을 수 없는 상황에 놀라 굳어있는 카가미와 달리 쿠로코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카가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분명히 쿠로코…… 인데, 저 녀석은 날 모르는 건가? 왠지 모를 실망감에 눈썹이 절로 처질 때, 쿠로코가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렸다. 서서히 번지는 미소에 존재감이 스멀스멀 드러나는 듯했다.
아아, 진짜로 쿠로코다.
감격이 가슴을 채워 오는 차에, 쿠로코가 카가미를 향해 인사말을 던졌다.
“구면이지만 처음 뵙겠습니다.”
그 기가 막히고 아이러니한 인사가 사무치게 와닿아, 카가미는 저도 모르게 씩 웃어버렸다.
-END
중딩흑자는 불스가미와 연락이 끊긴 시점에서 혹시 미래로 돌아간 게 아닐까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다음은 가만히 기다리다 세이린에서 카가미를 만나고, 카가미가 어쩐지 자기를 알고 있는 느낌이 들었을 때 비로소 안도해서 웃는 쿠로코가 보고 싶었어요^^;
교생흑자랑 불스가미는 잘 돌아가서 잘 만나고 잘 사귀고 천년만년 행복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