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편 이어집니다.
흑우 전력 60분 주제 '재회' 받아 썼습니다.
[화흑] 구면이지만 처음 뵙겠습니다 - 4
역시 어제 일은 꿈이 아니었을까요.
눈을 떴을 때 쿠로코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가미 타이가 선수와 이야기를 나눈 증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연락처도 모르니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구세주 같은 존재를 멋대로 만들어낸 게 아닌지 스스로의 머리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등굣길에 수상쩍은 그림자가 기웃거리는 것을 보자마자 가슴을 짓누르던 덩어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불안한 얼굴로 힐끔거리는 다른 학생들 틈에 섞이는 대신, 쿠로코는 우선 전봇대에 그 커다란 몸을 숨기려는 상대방의 헛된 노력을 지적해주었다.
“카가미 군, 가려지지도 않는데 평범하게 서있으면 안 됩니까?”
“아, 쿠로코! 학교 근처에 다 큰 어른이 그냥 서있으면 좀 수상해보이지 않아?”
“지금 그 꼴이 더 수상해보입니다.”
“뭣?!”
“혹시 절 기다렸나요?”
“어. 생각해보니 연락처도 모르고 해서…… 그런데 그렇게 수상해 보이냐?”
“네, 무척이나.”
“그, 그럼 빨리 연락처나 알려줘! 그것만 받으면 갈 테니까.”
“소년에게 연락처를 요구하며 언성을 높이는 성인 남성…… 신고감이네요.”
“윽.”
“좋습니다. 하지만 헤어질 때 드리겠습니다.”
“그게 지금 아냐?”
“아뇨, 오늘은 저랑 어울려줘야겠어요. 저 꼭 한 번 땡땡이 쳐보고 싶었거든요.”
등굣길에, 단정하게 교복까지 차려입고 할 말은 아니었지만 카가미는 의외로 선뜻 오, 그거 좋지. 하고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그럼 빨리 여기서 벗어나자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뒤따르는 쿠로코는 왠지 신기한 기분이었다.
바로 전날 알게 된 사람을 이렇게 믿어도 되는 걸까요. 미래에서 왔다니 그런 황당한 일이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머리는 이성적인 판단을 도출했지만, 역시 믿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소중한 친구가 상처 입게 두었고 빛과는 멀어져 눈앞은 캄캄하기만 할 때, 카가미는 쿠로코를 찾아내 ‘내 그림자’라고 말해주었다. 가슴 뭉클한 울림이었다.
“그나저나 너 수업일수는 괜찮아?”
“그동안 개근이었어요. 솔직히 제 존재감이라면 마음껏 빠져도 개근상을 탈지도 모르죠.”
“하긴.”
“……좀 부정해주길 바랐는데요.”
“아무튼 뭐 좀 먹으러 가자. 네 등교 시간을 몰라서 아침도 못 먹고 나왔다고.”
“저는 먹었습니다만…… 어디로 갈 생각인가요?”
“네가 좋아하는 곳.”
전혀 짚이는 데가 없어 고개를 기울이자 카가미는 일단 가보자며 바로 결론을 내렸다. 상쾌할 정도로 시원스러운 모습이었다.
“치즈버거 20개에 콜라 라지 하나, 바닐라 셰이크 미디엄 하나 줘…… 요. 먹고 갈게…… 요.”
서툰 존댓말로 어마어마한 주문을 하는 카가미에게 점원이 경악해서는 주문을 확인했다. 카가미의 뒤에 선 쿠로코도 적잖이 놀랐지만 카가미는 그 주문 맞아, 요.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 바닐라 셰이크 먼저 주세…… 요. 쿠로코 넌 가서 자리 좀 맡아놔.”
“저 아직 주문 안 했는데요.”
“넌 저거잖아, 바닐라 셰이크.”
“네?”
“너 설마 마지바도 바닐라 셰이크도 처음이야?”
“네. 군것질도 하굣길에 먹는 가리가리군 정도여서요.”
“오, 그럼 역사적인 순간이네.”
카가미가 이를 드러내고 환히 웃으며 점원이 내민 바닐라 셰이크를 쿠로코에게 쥐여주었다. 멍하니 받아든 쿠로코는 카가미의 눈짓에 따라 바닐라 셰이크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갑고 달콤하고 사르르 녹았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너 진짜 그거 좋아하네. 지금 무진장 행복해 보인다구.”
카가미의 말에 쿠로코는 당신도 무진장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입 안에 감도는 단맛에 말을 삼켰다.
도서관에 가고 싶어요, 에 기껏 땡땡이 치는데 가는 데가 겨우 도서관이냐, 하고 핀잔을 주면서도 카가미는 순순히 쿠로코의 의견에 따라주었다. 그러니 자리를 잡고 앉은 지 10분도 안 돼서 잠들어 버린 것은 눈감아 주기로 쿠로코는 마음먹었다.
맞은편에 앉아 문고본을 읽던 쿠로코가 책장을 덮었을 땐 거의 2시간 반은 지나 있었다. 다음 책을 집으려던 쿠로코의 시선이 곧 카가미의 얼굴에 멈췄다. 성인 남성인데도 자는 얼굴은 그저 천진해 보였다. 더 미래의 자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과 멀지 않은 자신이 카가미를 빛으로 선택한 속셈은 알 것도 같았다.
아오미네 군이나 기적의 세대가 제 맘대로 안 된다고 새로운 빛을 찾아 농구한다니, 형편 좋을 대로 카가미 군을 이용할 생각이었을까요. 제 자신이 싫어지네요…….
눈부시도록 밝고, 선하고, 아무튼 지금의 자신에게는 과분한 존재였다. 평소에 마음이 맞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제가 농구만 하지 않으면 이 사람과의 인연은 없겠죠.
식은 머리로 생각하면서도 그건 좀 아쉽다고 느끼는 이기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따갑게 닿는 시선에 반응했는지 카가미가 움찔하더니 곧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더니 쿠로코와 눈이 마주쳐서는 멋쩍은 듯이 살짝 웃었다. 그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 지으면서도 쿠로코는 가슴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미래의 저는 저 사람에게 얼마나 죄책감을 안고 살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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