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편 이어집니다.
흑우 전력 60분 주제 '재회' 받아 썼습니다.
주제 보자마자 전에 푼 썰을 글로 풀어야겠다 싶더라고요..
[화흑] 구면이지만 처음 뵙겠습니다 - 1
“카가미……타이가.”
성과 이름 사이에 잠깐의 공백을 두고 부르는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라, 등교하자마자 쭉 턱을 괴고 창밖만 내다보고 있던 카가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옮겼다. 흰 셔츠에 회색 카디건 차림으로 교탁에 선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로, 칠판에는 깔끔한 글씨체로 낯선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러고 보니 교생이 온다고 했었나? 아무래도 좋지만.
카가미는 네, 하고 대답하고는 도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핏 눈이 마주쳤을 때 교생의 눈이 흔들린 것 같았지만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아 기분 탓이겠거니 했다. 아무튼 아예 고개를 돌리고 나자 교생의 흐릿한 인상은 곧바로 잊혔고, 다만 의식 너머로 스쳐 지나는 고요한 목소리는 귀에 거슬리지 않아 낫다고 생각하며 카가미는 다시 온몸을 좀먹는 무기력과 울분에 잠겨들었다.
교생은 쿠로코라고 했다. 겨우 한 달이면 사라질 교생의 이름을 기억할 만큼 카가미는 살갑지 않았고 그럴 여유도 없었으며 이름은 외우지도 못했지만, 아무튼 본인이 매번 성을 알려주는 통에 그 정도는 머릿속에 남겨두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쑥 나타나고, 넌 뭐냐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카가미에게 태연한 낯으로 ‘너희 반과 국어과를 맡게 된 교생 쿠로코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일이 몇 번씩 반복되면 그야 기억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혼자 있는 학생이 신경 쓰여 교사 지망생의 책임감으로 접근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난 혼자가 편하니까 신경 꺼……요, 하고 어색한 존댓말로 밀어냈을 때 쿠로코는 정말 조금도 읽히지 않는 얼굴로 딱 잘라 대답했다.
제가 먼저 여기 있었는데 착각이 심하네요.
그 말을 듣자 민망함에 시뻘게진 카가미에게 쿠로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일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듯 다시 읽던 책에 집중하는 쿠로코를 보자 경계했던 스스로가 허탈해질 정도였다.
교정 뒤편이나 운동장 구석, 옥상 계단참. 그동안 카가미가 독차지했던 인적이 드문 곳에는 어느샌가 쿠로코가 먼저 자리 잡고 있었고, 카가미는 존재감 없는 이 교생을 좀 특이한 사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쓸데없는 간섭도 하지 않고 말도 거의 걸지 않아 같이 있어도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얼마 뒤엔 없을 사람이라는 점도 한몫했지만.
빵을 잔뜩 사서 뒤뜰로 왔을 때, 카가미는 작은 도시락 하나를 비우고 막 젓가락을 내려놓는 쿠로코를 발견했다. 또냐. 기가 막히게 계속되는 우연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자리를 피할 이유도 없어 한 사람이 앉을 만큼 사이를 비우고 카가미도 옆에 앉아 빵 봉지를 뜯었다. 쿠로코는 도시락을 보자기에 잘 싸서 옆에 놓고는 가져온 책을 집어 들었다.
“선생님 교무실 왕따야?”
문득 물은 건 단순한 변덕이었다. 물어봐 놓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한입 가득 빵을 무는 카가미를 쿠로코가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우선 제대로 존댓말 쓰세요. 그리고 그런 걸 물으면 저도 카가미 군에게 비슷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요.”
“아.”
말은 그렇게 해놓고는 카가미가 왕따인지 아닌지는 궁금하지도 않은 것처럼 쿠로코는 질문에만 간단히 대답했다.
“일부러 누가 따돌릴 만큼 존재감이 있진 않으니 왕따는 아닐 겁니다.”
남 얘기하듯 담담한 태도였다. 왕따는 아니라고 해도 스스로 존재감 없다고 하는 것도 좀……. 뭐라 할 말이 없어 멀뚱멀뚱 쿠로코를 보며 빵만 씹던 카가미에게 쿠로코가 빙긋 웃었다. 처음 보는 미소에 놀라 카가미는 저도 모르게 빵을 꿀떡 삼켰다.
“웃으면 존재감 없지도 않네……요.”
조금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쿠로코는 곧 책을 펼치며, 아는 사람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하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오늘 체육은 농구였나요?”
체육복 차림으로 공 바구니를 정리하고 있던 카가미는 불쑥 말을 건 쿠로코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공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요, 하며 쿠로코는 공을 주워 들었다. 운동과는 연이 없을 듯한 얼굴로 능숙하게 공을 튀기던 쿠로코는 슛을 쏠 것처럼 골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에 이끌려 림을 올려다본 카가미를 놀리듯 다음 순간 쿠로코는 얌전히 공 바구니 안에 농구공을 넣었다.
“빨리 뒷정리하고 교실로 돌아가세요.”
이번에도 별말 없이 돌아서는 쿠로코를 카가미는 저도 모르게 불러 세웠다.
“저기, 선생님 혹시 농구 했었어……요?”
체육관에서 나가려던 중에도 성실하게 몸을 돌린 쿠로코가 카가미와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네, 했었습니다.”
“약해 보이는데…….”
“뭐, 누구처럼 NBA 선수라도 될 만큼은 아니었죠.”
“선생님 농구 좋아하는구나? ……요?”
“카가미 군, 언제까지고 귀국 자녀라는 변명이 통하진 않아요. 국어도 제대로 공부해두세요.”
“선생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요.”
“교생이라도 일단은 선생입니다.”
쿠로코의 핀잔에 어느새 말려든 카가미가 어라, 이런 얘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고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쿠로코는 카가미를 보고 쿡쿡 웃더니 말을 이었다.
“농구는 정말 좋아하고, 약하진 않다고 자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헤. 그럼 지금 한판 어때, 요?”
저도 모르게 도발하는 카가미에게 쿠로코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정리하고 교실로 돌아가랬죠. 엄한 얼굴로 말하는 쿠로코의 말에 따라 카가미는 순순히 공 바구니를 옮겼다. 준비실로 향하는 카가미의 귀에 쿠로코의 중얼거림이 닿았다.
“저는 역시 당신과의 대결은 내년으로 아껴두고 싶으니까요.”
영문 모를 말이었다. 내년? 몇 주 후면 당장 교생실습도 끝날 텐데? 고등학교 선생이라도 될 생각인가? 내가 어디로 진학할 줄 알고?
하지만 카가미가 무슨 소리냐고 돌아보기도 전에 쿠로코의 발자국 소리는 체육관 밖으로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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